글로벌 시대의 한국무용 松原孝俊(Matsubara Takatoshi)
글로벌 시대의 한국무용
일본
규슈대 한국연구센터 전임교수 松原孝俊(Matsubara
Takatoshi)
|
- 목 차 - 서론 제1부:민족무용이란 무엇인가? 제2부:
1절: 일본인이 본 한국무용:조선왕조시대
2절: 일본인이 본 한국무용:일제 강점기
3절: 일본인이 본 한국무용:1945년~1965년
4절:일본인이 본 한국무용:1965년 ~2000년 제3부:글로벌 시대의 한국무용에 거는 기대 |
서론
본 논문의 목적은 17세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약 400년간 일본인이 어떻게 한국무용을 관람하였는지에 대해 한일교류사의 관점에서 통시적으로 논하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일본인으로 범위를 한정해, 일본인의 한국에 대한 시선과 한국무용과의 관계를 고찰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글로벌 시대의 한국무용에 거는 필자의 기대를 피력하고자 한다(1).
원래 필자는 무용전문가가 아닐 뿐더러 한국무용에 관한 지식이 전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새로운 시점을 도입하여 무용을 분석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며, 그것을 필자에게 요구한대 해도 달리 대처할 방법이 없다는 점을 미리 말해 둔다. 무용에 대한 전문적 논고는 그 방면의 전문가에게 일임하기로 하고, 비전문가인 필자는 일본인과 한반도의 긴 교류역사 속에서, 결코 많다고는 할수 없을 지라도 17세기부터 오늘에 이르는 각종자료 속에 한국무용과 관련된 기사가 산발적으로 보이는 바, 이번 기회에 일본인에 의한 한국무용관람의 역사를 간단히 정리하는 것에 불과하다.
이를 위해 필자가 알고 있는 한 가장 오래된 기록이 남아있는 17세기를 시발점으로 하여
1)일본인이 본 한국무용:조선왕조시대 - 일본인과 한국인의 교류가 일부 일본인(대마도)에게 한정된 시기
2)일본인이 본 한국무용:일제 강점기-일본이 한반도를 식민지화하여 대량의 일본인이 한반도를 침략한 시기
3)일본인이 본 한국무용:1945년~1965년 일본인의 한반도방문이 엄격하게 제한된 시기
4)일본인이 본 한국무용:1965~2000년-일본인의 한반도 방문이 전면적으로 개방된 시기
의 약 400년간을 4기로 나누어 각각 개관한다. 단지 고대 동아시아에 있어서의 교류를 생각할때, 한국무용이 일본인에게 끼친 문화적 영향력은 일본서기 등의 고대문헌 등에 오락 등의 한국무용을 가르쳤다는 내용이 다수 보이지만 고대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하고 본고에서는 대상 외로 한다.
원래대로 한다면 본고의 서두에 한국무용에 대한 정의와 필자의 입장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지만, 단지 여기에서는 「한국민족에 의해 옛부터 전승된 고전 기법을
기초로 하여, 무대 위에서 표현되는 예술무용」이라고 간단히 설명해 둔다(2).
제1부 민족 무용이란 무엇인가?
(1-1)서두를 개인적인 경험으로 시작하는 것을 용서해 주셨으면 한다. 최근 2~3년간, 큐슈 대학 한국연구센터는 후쿠오카현민을 대상으로 한 심포지엄을 주최해 왔다. 매년 다른 주제로서 지금까지「다도」와「꽃꽂이」를 테마로 하여 한일비교문화를 고찰할 기회가 있었다.
지금, 그 두번의 「전통 문화」심포지엄을 떠올려 보면 극히 대조적이었던 것은, 한국측 강연자가 모두 그 예술의 원류를 고구려시대에까지 소급하여 약 2000년 이상의 전통을 과시한 것에 비해 일본측은 전통에 무관심했다는 것이다. 일본의 입장으로 보면, 다도나 꽃꽂이 모두 그 기원을 일본 중세, 즉 16 세기정도 밖에 거슬러 올라갈 수 밖에 없기 때문에, 그 전통성의 빈약함에 문화적 원류에 대한 언급을 피하고 싶다는 심리적 압박이 있었을지도 모른다(3).
한편, 한국측
이러한 예에서, 역사학자 Eric
Hobsbawm이 설명하는 유명한「만들어진 전통」개념(Invention
of Tradition)을 가지고, 한국의「꽃꽂이」와「다도」의 전통을 설명하고 싶은 유혹에 빠지는 분도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필자는 그럴 생각이 없다(4). 그것은 한국에서 초빙한 강연자가 지적하는「고구려 고분벽화」와 현재의「꽃꽂이」의 계보를 자신있게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필자의 관심대상인 「무용」만 하더라도, 고구려 고분에「무도도」가 그려져 있는 이상, 한국 무용의 원류를 고구려에서 찾는다고 해도 나쁠 리는 없을 것이다.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고구려시대에 백두산에 내린 비가 지하수가 되어 현대의 우물에 솟기 시작했다」라는 타입의 논법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 필자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그러한 사회적인 「언설」이다. 한국에는 모든 민족문화는「원시·고대 (단군·고조선 혹은 고구려·신라)에 거슬러 올라가는 유서 바른 것」이며, 「부활시켜야 한다」라고 하는 언설이 지배적이라고 말할수 있을 것이다. James
Clifford가 지적하듯이, 「근대의 민족지의 역사는, 두 개의 서술형태 속에서 진행되었다고 할 것이다. 하나는 동질화의 서술형태이며, 다른 하나는 생성의 서술형태이다. 즉 소멸의 서술형태와 창조의 서술 형태이다」(5) 한국의 민족문화에 대한 서술은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이 진행되어왔다. 한국 민족고유의 우수한 민족의 혼을 보존하자는, 즉 급격한 공업화 정책과 글로벌 시대의 전개에 의해 소멸하고 있는 순수 민족 문화를 부활시키자는「부활의 서술형태」이다. 또 1910년부터 시작된 일본 강점기 한반도에 있어서, 일본을 경유해 온 서양 문화와 접촉함으로서 고유한 민족 문화는 변용하였고, 더욱이 조선총독부의 폭력에 의해 많은 민족 문화가 파괴되어 소멸하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시급히 순수한 민족 문화를 보존 관리하여, 소멸의 위기에서 구해내야 한다고 주장하는 지식인은 인기가 있고 매스컴에도 자주 등장한다. 바꾸어 말하면, 한국 민족문화의 훌륭함은 일본문화나 서양문화, 그리고 중국 문화등에 오염되지 않은「한국민족의 순수성」이 있어야 한다는 논법을 채용하고 있다. 필자 혼자만의 상상인지도 모르지만, 이러한 현상은 수천년 전 존재했다는「요순시대」에 이상적 정치가 실현되고 있었다고 하는 사고법의 연장선상에서 고구려시대, 또는 단군의 시대에 이상적인 한국민족문화가 번성하였다는 전제가 성립이 되고 또 이를 추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주지하는 바와 같이 「잃어버린 고대문화」에 대해 집착한다는 것은 근대적인 사고이며, 결국 순수한 문화라고 하는 것은 「근대 사고」가 만들어낸 사회적 언설이라는 것은 설명하지 않아도 알것이다.
여기에서 필자의 입장을 밝혀두겠다.
단적으로 말하면, 민족문화를 「회귀의 언설」에 묶어두면 안된다는 입장이다. 일본이나 서양, 중국 문화등과의 접촉에 의해 한국민족문화의 변용을 비관하거나「순수한 전통」의 소멸을 애석해하는 것은 넌센스이기 때문이다. 원래 문화란 항상 유동적인 것으로, 때로는 반발하기도 하고, 또 때로는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끊임없이 클레올화(혼합화)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순수와는 정반대의 것」이 문화인 것이다(6).
(1-2)이러한 필자의 입장을 설명하기 위해서 두 개의 민족 무용을 예로 든다. 첫번째는, 서카롤라인제도의 Yap섬의 무용이다. Yap섬에는 BC 1500 년경에 동부 인도네시아로부터 이주해온 항해자들이 살기 시작했다.
1525년, 후추를 찾던 포르투갈의 항해자들은 태평양 항로의 중계지와 서양을 위한 교역품인 코코넛의 생산 거점으로서 Yap섬의 경제적 가치를 발견했다. 그 후, 식민지 통치를 거치면서 식민 종주국에의 경제적 이윤을 낳는 땅이라는 이유보다는, 괌 처럼 지리적인 전략방어상의 요새라는 이유로 독일(1899~1914)과 일본 남양청(1914~1945)의 식민지지배를 거쳐,
1947년부터 유엔의 신탁통치령(TTPI=Trust
Territory of the Pacific Islands)이 되었다. 현재는, 미크로네시아연방의 일원이지만, 미국의 경제 원조 없이는 국가적재정을 유지할수 없는 상태에 놓여있는 곳이다.
태평양에 떠있는 격리된 섬인 Yap섬의 경우에 있어도 외부의 영향이 전혀없이 순수한 상태의 문화가 오늘날에 까지 전해진 것은 아니다. Yap섬의 통치자가 누구였는지에 따라서, 약 500년간 그 식민통치 종주국(포르투갈→스페인→독일)의 문화적 영향을 피할 수 없었다. 이런 측면에서「서양에 의해서 더럽혀진 전통문화」의 땅이라고 바꾸어 말해도 좋을 것이다. 당연히「Yap
Dance」만해도 3500년 전 Yap섬에 처음 이주해 온 동부 인도네시아인의 민족 문화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지구 온난화가 자동차의 배기와 무관하다고 강조하는 자동차 회사의 선전 문구이상으로 논리적 무리가 생긴다. 그러한 주장은 포르투갈, 스페인, 독일, 일본, 미국으로 이어지는 식민지 통치자의 오만한 자기정당화에 지나지 않는다. 이미 그
Dance의 일부가 일본인의 지도로 만들어졌다고 판명되었다(7).
(1-3)눈을 돌려서, 인도네시아의 Bali섬의 무용을 다시 예로 든다.
학자들은 Bali하면
Clifford Geertz의 “Negara” (8) 를 상기하겠지만, 발리는 일반적으로 그 난해한「극장국가」론보다 「마지막 낙원」이라고 불리는 리조트지로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곳이다. 하지만, 문제는 Bali가 누구에게 있어서「낙원」이며, 누구에게 있어서「마지막」인가 하는 것이다. 원래 발리가 「마지막 낙원 Bali」라는 관광 상품으로서 팔리기 시작한 것은 1920년부터 30년대의 유럽인에 의해서 였다.
1906년에 네델란드군의 Bali
침공에 의해 네델란드의 식민지로 편입된 후, Bali는 급속히 유럽인 관광객 러시를 맞이했다. 화가 Eug
ne Henri Paul Gauguin은 작열하는 태양 아래에서 갈색의
Tahiti섬 아가씨가 아름다운 가슴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그림을 캔버스에 그려,
1880년대 유럽인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켰고, 사진매체를 통해 Bali의 여성 나체는 보다 생동감있게 선전되었다. 「풍부한 태양+장기간 바캉스 시스템의 정착+자유로운 성」의 세가지 이미지가 강조되면서 유럽인의 Bali에 대한 동경이 만들어졌다. 유럽인의 입장에서 「지상의 낙원」Tahiti보다 떨어져 있다는 의미에서 Bali는「마지막 낙원」이 되었다(9).
당시의 유럽은, 많은 나라들이 식민지 종주국으로서 아프리카나 아시아, 남아메리카등을 식민지화하여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이로서, 유럽에서 2주일이나 걸리는 비싼 뱃삯에도 불구하고 Bali로 여행하는 것이 가능하였다.
1870년대부터 1900년에 걸쳐, 유럽에「일본 열풍」(Japonisme)이 일어나 모네라든가 마네, 도가, 르노와르, 고호, 로트 렉등과 같은 저명한 화가들은 우키요에(浮世絵)등을 수집하면서, 일본을「이상적 무릉도원」으로 묘사했지만, 실제 그들이 일본에 온 적은 없다.
그런데, 돈과 레져에 빠진 유럽인들에게 「마지막 낙원」은 의표를 찌르는 캐치프레이즈였다. 하지만 현실은 세계 곳곳에 존재하는 식민지의 독립에 대한 기운이 높아져 불안한 정세가 계속되었고, 더구나 독일과 일본의 군국주의가 진행하여 세계적으로 전운이 감도는 시기였기도 했다. 유럽인에 있어서 발리여행은 와인을 한 손에 우아하게 들고 디너쇼를 즐기며 호화 유람선을 타는「낙원」찾기였지만, 결국 이것은 유럽인의 현실도피 여행이기도 했던 것이다. 큰 돈을 들여 섬을 찾아온 유럽인의 이국 취미(Exoticism)에 부응하기 위해, 당시 Bali
에 정주하고 있던 유럽인들이 Bali섬의 문화를 관광용으로 재구성하고, 「관광 쇼」창출의 프로듀서가 되었다. 그 대표적 인물이 독일인
Walter Spies였다. 갈색 피부의 풍만한 나체를 가진「동양의 비너스」들이 유럽인 관광객을 항구에서 기다리는 것은 아니였기에 많은 유럽인에게 실망을 준 것은 틀짐없지만, 대신
Spies와 같은 관광 프로듀서들은 호화로운
Cottage나 Sea
View beach hotel 등을 정비하여, 긴 여행에 지친 유럽인에게 안락을 제공했다.
감청색 해변에 자리잡은 숙박시설의 욕조에서 몸을 담근 그들 유럽인은 모기나 벌레 등이 무단으로 침입을 하는 객실에 쓴웃음을 지으면서도, 또 말라리아나 뎅그열(dengue
fever) 등의 열대병 위험에 곤욕을 치르면서도, 한여름 밤의 엔터테이먼트를 요구했다. 낮에는 마린스포츠 등을 즐기면서 소란을 피우면서도 잠들지 않은 욕심많은 관광객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Spies와 같은 관광쇼프로듀서들은 우선 Bali섬에 인접한 자바섬 중부의 전통예능인 가라위탄에서 사용되던 악기를 흉내내어, Bali식의
Gamelan(타악기)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Bali섬북부의 연주 형태인 Gong
Kebyar를 기초로 1920년대에 현재 들을 수 있는 청동기 타악기 15 종류를 사용한 연주가 만들어졌다. Bali 무용의 꽃이라고 불려지는
LEGONG KRATON이나
KECAK도 1930년대 관광 쇼 전용의 무용으로 완성되었다. 또 주지하는 바와 같이
Ketut Mario(1897-1968)가 창작한
Kebyar Trompong이나 Kebyar Duduk 등은 1925년부터 공연의 프로그램의 하나로 추가 되었다.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유럽인의 관광 프로듀서와 관광객의 합작에 의해 네델란드 식민지 체제하에 팽배하던 오리엔탈리즘을 바탕으로 Bali 무용의 기초가 창조되었던 것이다. 현재 발리 인구 약 318만명(2006년 현재) 가운데 1만명 가까이가 Bali 무용 관련 일을 생업으로 삼고 있으며, 관광 산업 중에서도, 호텔업 다음가는 업종으로 성장하고 있다고 한다.
한편, 1970년대에 이르러 일본인 관광객의 증가됨에 따라 Bali 관광은 큰 전환기를 맞이했다. 연간 150만명에 가까운 외국인 관광객중에서 일본인 관광객이 전체의 5 분의 1에 달하는 연간 30만명이 발리섬을 찾게 되었다. 이에 발리의 관광 업계는 기존의 유럽 관광객뿐만 아니라, 일본인 관광객용의 상품들을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Marine
Sports와 쇼핑, 그리고 음식에 시간을 소비하면서, 미술관이나 박물관 혹은 음악이나 무용 등의 문화 활동 등 다방면에 관심을 가진 일본인 관광객을 위해, Bali의 무용쇼는 클라이막스나 볼만한 장면 만을 선별해 연기를 하는 형태로 변화되었다. 말하자면 영화의 예고 편을 연속적으로 보여주는 듯한 형태이다.
그런데, 글로벌시대를 맞이하여 시대적 의도와는 역행해 문제로 등장한 2005년의 연속 폭탄 테러사건 발생과 조류독감의 유행 등은 Bali관광에 치명적 타격을 주었다. 이러한 것이 아니더라도, 1997년~1998년의 아시아 통화 위기라든지 자카르타, 판간다란의 자연재해가 계속 되어 Bali의 외국인 관광객 침체현상이 심각하던 때에, 위와 같은 사건들은 한층 더 타격을 주게 되었다. 말할 필요도 없이 국내외 관광객용 무용쇼가 주된 수입원이던 Bali 무용계에 있어서도 막대한 타격을 주어 생활의 사활이 걸린 문제가 되었다. 더구나 글로벌시대는 생각지도 않았던 또다른 문제를 만들어 내고 있다. 원래 발리 무용은 Bali를 방문하지 않으면 접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텔레비전등 매스컴의 정보 침투, 또 인터넷 사회를 맞이하여 웹상에서 방대한 정보를 입수할 수 있는 시대가 찾아옴에 따라, 이미 Bali 무용에 식상한 관광객이 늘고 있다. 이에. 1960년대부터 음악학원, 댄스 아카데미, 아트 센터 등의 건설과 문화개발을 추진해오던 발리 주정부문화국의 활동은 더욱 바빠지게 되었다. 1980년대를 전후로 하여 각종의「문화 관광 페스티벌」을 기획하고, 또 연구를 거듭해 세련된 Bali 무용과 Bali아트를 관광객에게 제공하게 되었다. 이를 위해 Bali주정부문화국은 Bali의 지방 문화를 기록하고 각지에서 민속예능대회를 주최하고, 알려지지 않은 지역예술의 발굴에 노력을 기울여 왔다. 또 주정부 문화국은 Bali예능집단의 해외공연을 알선하고 세계 각지로부터의 Bali섬관광 유치에 기여하는 운동의 주체가 되었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Bali주정부문화국이 Bali섬의 지역 무용의 정수를 발굴하여, 그것들을 Bali 전통예능으로서 인정하고 품질보증을 위해,
① Pancasila에 적합,
② 인도네시아 국민의 품위와 위신, 교양을 향상하는 예능
③ 국가의 자랑
④ 시대의 흐름에 합치
⑤ 외국인에게 이해 가능한 것
⑥ 국민 통합에 기여하는 것
⑦ 인도네시아 국민의 Identity를 표현하는 예능,
등의 항목을 설정하고 심사도 담당했다는 것이다. 「마지막 낙원」이미지를
유지하기 위해서 Bali주정부문화국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이상으로Yap섬과 발리섬의 두가지의 사례를 통해 민족무용의 현재를 고찰하였다.
제2장 제 1절 일본인이 본 한국 무용 (조선 왕조 시대편)
|
Point : 외교와 Soft Power: 「봉오도리」 밖에 모르던 일본인(대마도인)에 대한 한국 무용의 우월성(세련된 예술성) |
(2-1-1)한일문화 교류사에서 1598년 임진왜란의 종결은 일본과 한국의 인적교류의 단절을 가져오는 하나의 시대적
구분이 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침략 목적이 「상호무역의 부흥」이었던지, 「중국 침략」이었든지 간에, 약 16만명의 병사가
1598년부터 한일 수교가 회복되는 1607년까지의 10년간, 양국간 인적 교류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대마도를 통해 파견된 외교교섭사절 수십명이 한반도에 상륙했을 뿐, 어민이나 상인들의 왕래는 전면적으로 통제되었고, 일반인의 한반도 출입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국제법적으로는, 1609년의「기서조약」의 성립으로 한일간의 교린관계는 수복되었다고는 하지만, 같은 해 도쿠가와 이에야스 정권의 외교 통제가 시작된 바, 새롭게 메이지 정부에 의한 외교교섭이 개시될 때까지의 약 260년간, 한국인과의 직접적인 교류는 대마도인으로 한정되었다. 부산에 설치된 왜관에 거주할 수 있는 일본인은 대마도인으로 한정되었고, 조선인의 일본 방문도 대마도까지로 제한된 결과, 한일간에 있어서 자유왕래가 가능해지는 것은 약 300년이 지난 후였다.
그렇다면, 1592년 이전 한일교류는 어떠하였던가?. 물론 주지의 사실이기도 한 바, 자세한 것은 村井章介에 맡기고 결론만 말하자면(10), 한일해협권은 일본인, 조선인, 중국인 등으로 구성되어 「민족 잡거상태」였다고 한다. 비록 명의 금해(禁海)체제가 시행되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한일해협권의 왕래를 저지하는 장벽이 되지 못했고, 이 해역의 왕래는 원칙적으로 제한이 없었다. 덧붙여서 1410년 경상도에는 약 2000명의 일본인이 거주하고 있었다고 전한다. 또한 당시 일본인의 한반도에의 도항은 대마도뿐만이 아니었던 것 같다. 1426년경부터, 한반도 남부의 3개 항구로 일본인의 입항장이 제한되었지만(이른바 삼포인 부산포 내이포 염포), 지리적 위치로 유리한 대마도인 뿐만 아니라, 그 이외 일본인(예를 들면, 규슈인 등)도 도항을 하고 있었다. 물론 1510년 삼포의 난이 발발한 이후 한일은 단교상태였다고 지적할지 모르나, 그런 상황에서도 1512년 임신약조에 의해 대마도로부터의 통교 만은 개선되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 2년간도 한일 관계에 있어서 단절의 시기이다.
(2-1-2)여기서 다시 임진왜란으로 이야기를 되돌린다. 조선과의 단절 상태는 대마도의 생명선을 자르는 것과 같은 결과를
초래했다. 대마도에 있어서의 한반도 무역은 그들의 유일한 권익수단이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조선통신사를 데리고 에도(지금의 도쿄)까지 동행하는 것은 도쿠가와정권에 대한 충성과 복종을 나타내는 수단이었으며, 에도시대를 통해 대마도인들이 적극적으로 조선통신사를 초빙하려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꺼꾸로 이야기하자면, 조선정부와의 외교교섭권을 독점한다는
것은 지방정부인 藩의 사활이 걸린, 즉 에도정부의 「藩 부수기」를 회피할 수 있는 수단이었던 것이다.
본고의 취지에서 벗어나는 듯한 조선무역의 설명은 한국무용에 도달하기 위한 과정이라는 것을 이해해 주었으면
한다. 아무튼 조선과의 무역량이라든지 이윤이라든지 하는 것과 같이 상세한 내용들에 대해서는 中村質, 田代和生,
공식선이든 임시선이든, 대마도로부터 파견된 선박에는 대마번주의 대리인이 1명 승선하고 있었다. 그 대리인은 부산에 상륙하면 공식적인 조선 국왕의 빈객으로서 향응을 받았다. 장소는, 부산 초량 왜관에 인접해 건설된 연대청이었다. 향응을 받을 때마다 조선 국왕의 대리인인 동래부사와 대마번주의 대리인 사이에 외교적 의례가 집행되었다. 이것이「차례의식」이다. 본래의 목적은 조선 국왕에 대한 대마도번주 대리인의 신임장과 진상품 목록을 제출하는 자리이다. 의례는, 진상을 한 뒤 조선 국왕의 자비에 감사하며 다음 도항도 허가해 줄 것을 바라며 「전패(殿牌)」를 향해 배례 한다. 이것이「숙배 의식」이다. 그 후, 쓰시마번주 대리인의 노고를 치하하고 우의를 돈독히 하기 위해 한국무용이 연출된다. 무희는 동래부 소속의 관기 6명이었다. 무희의 관기들은 동래부사의 행차에 동행하며 부사와 같이 말을 타고 연대청으로 향할만큼 특별한 대우를 받았다. 그 차례의식에서 행해진 무용의 공연내용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기록이 눈에 띄지 않지만, 19 세기의 중엽이 되어 기록된 대마도측통사 小田管作의 메모를 보면 그 상연 목록은 다음과 같았다고 한다(11).
1.平舞:손목에 옷감 걸어 5~6치수 늘어뜨린 후 음악에 맞추어
춤춘다.
2.錚舞:銑鉢과 같은 것을 세로로 손가락에 걸어 좌우로 소리를 내며 춤을 춘다
3 抛球楽(포구락): 천정에서 동아줄을 내려 손이 미치지 않은 곳에 원형 골대를 만들고 무희가 볼을 던져 골대에 넣으며 추는 춤. 조금 장난스러기도한 공놀이에서 유래.
4,漁父楽:本釣와 운오도리를 닮았다
5,鼓舞
6,虎龍舞
7,鶴舞
8,玉佩舞
9,蟠桃舞
10,剣舞
11、舞童舞
12,樓船舞
13,黄昌舞
14,酔僧舞
15.男舞
이 자료를 통해 당시 추어진 무용이 15 종류였음을 알게 되었다. 小田의 메모에서는 15 종류의 춤 중에서 4 종류의 무용에 관해서만 일부를 기록하고 있고 , 나머지의 11 종류의 무용은 명칭만 소개하고 있다. 이러한 무용의 구체적 내용에 대한 검토는 다른
지면을 통해 소개하도록 하겠다. 덧붙이면, 조선에서는 연회를 열어 접대하는 것을 「이바지하다」라고했다한다. (『御上京之時毎日記』1629년6월9일)
대마도에 파견되는 외교사절, 또는 에도까지 가는 조선통신사의 배에는 여성이 한 명도 동승하지 않았기 때문에 무용전문가인 관기가 일본에 파견된 사실은 없었을 것이 확실하다. 따라서, 1609년부터 1960년대 후반까지의 약 350년간, 한국 무용을 본 일본인은 대마도에서 부산 초량왜관에 파견된 정사와 그 수행자들에 지나지 않았다.
(2-1-3)여기서 의문으로 생각하는 것은 원래 여인 출입을 금지하는 부산 초량왜관에 왜 관기를 동행시켜 더구나 외교 의례의 장소에서 그녀들에게 무용을 시켰는가 하는 것이다.
원래 외국에서 오는 사신에 대한 국왕 주최의 환영연회는 궁내에 있는 경회루에서 실시되었다. (자세한 것은 국조오례의 참조). 부산 초량의 연대청에서 벌어진 그 환영연회는 그러한 외교의례의 미니추어, 즉 축소판이었던 것이다. 「차례의식」 자체의 집행 목적을 생각했을 때, 관기의 무용은 반드시 필요한 요소가 아니었고, 오히려 경비의 낭비였던 것이다. 또 대마도나 에도에 파견된 조선국왕의 사신에 대한
일본측의 환영연회에서는 일본 무용을 피로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양국이 극히 대조적이기까지 하다.
그렇다면, 왜 외교교섭의 장소에서 일본인에게 한국무용을 관람시켰던 것인가?. 단지 추측에 불과하지만, 필자는 그것이 「외교교섭의 장소에 있어서의 Soft
Power」라고 이해한다(12). 서울의 국왕 주최 연회에서 무용이 행해졌는지 어땠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적어도 부산 초량의 연대청에서는 향연 속에
한국무용이 피로되었다. 하지만, 프로그램의 제작 의도를 아는 단서가 없기 때문에 더 이상 언급하는 것이 상당히 곤란한 것은 사실이다. 단지, 그것을 관람한 대마도인들이 당시까지 알고
있던 춤은 가구라(神楽)나 봉오도리(盆踊り)、노(能楽) 가부키(歌舞伎) 등을 모체로 하는, 즉 말하자면 가부키무용(歌舞伎舞踊)이나 자시키무(座敷舞)의 전통을 가진 上方舞나 京舞등에 불과하였다는 것을 생각할 때, 몸치장을 한 관기들의 춤은, 일본인의 눈에는 틀림없이 화려하게
비추어졌을 것이 틀림없다. 이것을 필자는 「Soft Power 」라고 하는 개념으로 이해하고 싶다.
제 2절: 일본인이 본 한국무용(1910년- 1945년)
|
포인트 :1 그림엽서와 Exoticism
2 제2차대전 당시 일본에서 「발견」된 「조선」 |
(2-2-1)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 패배한 1945년 8월, 한반도에 거주하고 있던 일본인은 약 70만명이었다. 일반인 이외에도 군인과 주민등록을 하지 않은 다수의 일본인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하는 바 약 90만명이 한반도에 거주하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1880년대부터 일본인은 무단으로 한반도에 진출, 집을 짓고 생계를 영위하기 시작했는데, 본격적인 일본인의 이주는 한일합방 후인 1910년 이후부터 였다. 과연 한반도에 거주한 일본인의 전체적 통계는 얼마나 될까?. 만약 정주자 이외에 작가 나쓰메 소세키나 화가 고이소 료헤이 등의 저명인사를 비롯한 관광객이나 일시체재자 등을 포함한다면 그 수는 헤아릴 수도 없을 것이다.
관부연락선을 이용해 한반도에 발을 디딘 일본인의 대부분은 비록 식민지라는 자국영토라고는 하지만 도착후 그들 눈에 들어온 풍경은 강렬한 인상을 안겨주었을 것이다. 부산항이나 부산역은 붉은 벽돌의 유럽풍 건조물이었지만, 한국풍 지붕이 늘어서있는 거리 풍경과
거리를 활보하는 「백의민족」 복장에 그들은 놀랐을 것이다. 그리고 일본인들이 한반도에 도착한 후, 자신들의 무사함과 한반도의
신기함을 가족과 친지에게 알리기 위해 사용된 중요한 수단이 그림엽서였다. 그림엽서 뒷면에 있는 조선의 풍경은 자신의 현황을 알리는 보조자료 역할을 하고, 또 간단하다는 편리함 때문에
그림엽서가 즐겨 사용되어졌다.
말할 것도 없이 그림엽서는 이하 조건 아래 성립되었다.
1, 엽서의 뒷면의 사진을 인쇄하기
위한 콜로타이프 인쇄 기술의 발달
2, 사진 촬영 기술
3, 사진기가 일반화 되지 않은
사회적 상황에서 그 대체기능. 즉 에도시대의 우키요예(浮世絵)와 비슷한 기능
4, 사제 엽서 사용 허가
5, 한반도 전 국토에 우편
배송 시스템의 확립
그림엽서가 일본인들에게 사용되어지기 시작한 것은 1900년이었다. 일본 우편법의 공포에 의해 국민 누구나 우편을 보내수 있게 허가된 시점부터 그림 엽서도 사용되었다. 그림엽서의 전단계로서 사진의 인쇄라든지, 흑백사진에 착색해 칼라 사진으로 만드는 기법, 그림을 인쇄하는 기술은 이미 도입되어 있었다. 이러한 그림엽서가 일반인들에게 유용성을 인정받아 보급되게 되는 것은 1904년의 러일 전쟁 발발이 그 계기가 되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러일전쟁의 전지는 중국이었으며, 전황을 전하는 수단으로서 그림 엽서가 대유행을 하게 되었다. 게다가 병사가 중국에 수만명 파견되었으며, 승리의 전과와 함께 중국 동북부의 거리풍경을 찍은 그림 엽서가 대량으로 생산됨에 따라 그림엽서는 군사 우편으로서 사용되게 되었다. 일본 정부가 파견한 전쟁 종군 카메라맨이 찍은 전지상황의 사진을 기초로 하여, 체신청이 발행한 「러일 전쟁 기념 관제 그림 엽서」(6종 1조, 정가 12전, 제1회~ 제12회)가 발매되자 마자, 공전의 대히트가 되었다. 일본내의 승전무드에 편승하여 잇달아 러일 전쟁 관련 그림엽서가 인쇄되었고, 발행되는 것 마다 판매량은 폭발적이었다 한다.
일본 통치하의 한반도에 있어서도 비슷한 시기에 일본 국내를 시야에 넣은 그림엽서가 제작되었다. 한반도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의 구입 성향은 일본 국내 상황과는 다르게 다양하게 나타났는데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식민지의 이국 취미
2. 식민지의 일본화상황
3. 식민지의 명승 정보
4,.식민지의 번영의 증거
5. 한국 풍속
6. 학교나 백화점의 기념 그림 엽서
7. 농촌 수확 풍경이나 근대화 된 시가지 풍경등을 이용한 식민자 유치목적의 그림엽서
8. 박람회등의 조선 총독부 정책의 선전
9. 조선의 여성미
10. 조선의 직업 카탈로그: 양반·기생·단지장사·물장사 등
11.조선의 직업소개
현재와는 달리, 영화 텔레비젼, 인터넷등이 없던 시대였기에 그림엽서의 한반도를 알리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다.
(2-2-2)여기에서 소개하는 그림엽서는 쇼와(昭和) 초기 서울의 스냅 사진이다. 한복을 입은 3명의 여성이 궁내에서 춤추고 있다. 그림 엽서에 기재된 문자 설명은 「봉래의」이고, 일본인 전용으로 제작된 그림 엽서에는 「봉래의 」이외에 부채춤 등이 있다. 많은 일본인에 있어서 「봉래의」든 뭐든 모두 미지의 세계였을 것이다. 일본 국내로 우송되어 온 그림 엽서를 본 일본인의 99% 이상은 처음 접하는 한국 무용이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예를 들어「봉래의」를 예로 설명해 보자. 아무런 문화적 문맥을 설명하지 않고 갑자기 「봉래의」라는 화상정보가 기재된 그림 엽서를 손에 든 일본인에 눈에 들어온 것은, 나막신과는 다른「흰 신발(고무신)」과 기모노와는 어딘가 다른 한복, 일본식 모자와는 다른 머리장식과 봉오도리와는
다른 손의 움직임이었을 것이 틀림없다. 직감적으로, 그림 엽서를 엽서를 손에 든 사람은 문화적 위화감을 느꼈을 것이며, 이국 땅에 가서 고생」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3명의 여성이 서있는 배경도 일본인에게는 낯선 건물이다. 여기서 한가지 의문이 생긴다. 대체 사진을 찍은 카메라맨이나 그림 엽서 출판자의 제작자는 왜 실내가 아닌
실외에서 촬영을 했을까? 바꾸어 말하자면, 일본에 우송된 그림 엽서를 손에 든 사람은 엽서의
뒷배경을 전혀 이해할 수도 없었을 텐데 왜 그런 그림 엽서를 제작한 것일까?. 물론 당시 조명기술로서는 조명의 문제를 안고 있던 시기였기에 옥외 촬영이 불가피하였다고 추측할 수도
있으나, 필자는 그 이상의 목적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즉, 옥외에서 촬영을 한 이유는, 일본무용과는 달리 한국 무용은「마당」에서 연기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알리며, 그 문화적 차이를 나타내고 싶다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Edward Wadie Said의 오리엔탈리즘식으로 말하자면, 「우월한 제국국가 일본과 열등한 피지배 민족 조선과의 사이의 엄격한 구별」을 위한 수단이었다. 즉, 일본국내에 서구로부터 보내져 온 관광그림 엽서가 가지는 이미지와는 달리, 식민지에서 우송되는 화상 정보 속에는 명확히 식민지
주의가 내포되어 있었고, 일본인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비록 보내는 사람과 받는 사람이 그러한 문화적 맥락을 몰랐다고 하더라도 말이다(13).
일본통치기 조선에서 제작된 그림엽서에는 반일적 이미지를 환기하는 화상을 허용 하지 않았다. 거기에는 일본인의 특권적인 원근법, 즉 식민지자의 오만함에 의해 식민지 풍경을 통한 과거에 대한 그리움의 환기, 식민자의 유치, 식민지의 번영을 투영 하고 있으며, 한 장 한 장의 그림 엽서가 식민지주의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2-2-3)이러한 기본적 생각에 도달한 필자가 생각나는 것은 1915년 한일합방 5주년 기념 이벤트로서 개최된「조선물산공진회」(장소: 경복궁, 9월 11일~10월 31일).
기념 공진회는 다음과 같다.
1. 본회는 화려함 보다는 실질을 목적으로 하는 공진회의 목적을 망각하는 일이 없기를 기대한다.
2. 출품에 있어서는 단지 조선의 물산뿐 아니라 산업, 교육, 위생, 토목, 교통, 경제등에 관한 시설및 통계도 망라하고, 산업 그 밖의 문물의 상황 및 그 개선의 진보 상태를 전시하는데 노력한다.
3. 출품은 몇 가지로 분류하고, 또 그 분류한 것들을 자세히 종목별로 구분하여 그 차이를 명확히 함과 동시에, 도별전시를 통해 도마다의 차이를 알수 있도록 출품할 것.
4. 내지(일본) 생산품의 출품은 조선의 생산업에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것
및 외국 수입품의 판로 확장의 필요성이 인정되는 생활필수품에 한해 출품을 승인한다.
(14)
(2-2-4)결국, 식민지「조선」의「디스플레이」를 통해 공진회는 「조선인의 개발을 목적으로 많은 조선인들에게 보여주려는 조선총독부와 공진회 관계자의 의향에 따라 가능한한 많은 조선인들이 볼 것을 바란다」(「내외 상업 신보」1915년 10월 4일)는 목적으로 개최되었다. 이는 이미 벌써 일본국내에서 개최된 내국권업박람회의 흥행적 성공이 모델이 되었다고 생각되며, 그 조선물산전에서 한국 무용이 연기 되었다.
9월 12일(일요일)
1,291입입장
익살스러운 동작의 기생무용: 연화합무(蓮花合舞) 봉래의(鳳来儀), 북춤
9월 19일(일요일)
1,023입입장
광교(広橋)의 기생무용: 육화대(六花隊) 춘학무(春鴬舞) 무애무(無碍舞)
9월 25일(토요일)
1,025입입장
광교의 기생무용: 북춤, 연화대무, 춘학무
9월 27일(월요일)
1,066입입장
광교의 기생무용: 홍문숙(鴻門塾) 연백복무(演百福舞) 승무
10월 2일(토요일)
1,214입입장
익살스러운 동작의 기생무용: 봉래의, 장생보연무(長生宝宴舞,쌍검무
10월 17일(일요일)
1,098입입장
광교의 기생 무용: 박첩무(撲蝶舞),연화대무,승무
10월 24일(일요일)
1,168입입장
익살스러운 동작의 기생무용: 수연장(寿宴長), 가인전모란(佳人剪牧丹),칼춤)
오늘날 이 17종의 한국 무용에 대한 구체적 연출내용은
알 길이 없지만(15), 한국인을 대상으로 조선물산공진회에서 공연된 한국무용은「제국」에 길들여진 이데올로기 장치로서 물산공진회의 프로그램에 짜넣어졌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즉 일본 통치기에 있어서, 외부인인 일본인이 조선인에 대해 조선무용이란 무엇인가를 가르치는 역설적 현상이 일어나고 있었다.
(2-2-5)여기서 조금 화제를 되돌리면, 일본내의 일본인에 부쳐진 그림 엽서라는 미디어에 소개된 한국인 여성은 다양한 계층·직업·가정내 노동·이동등의 모습이 사용되었다. 그리고, 상술한 것처럼, 식민지 정부는 당시의 한국은「민중은 도탄의 괴로움을 맛보고, 산야는 황폐해지고 산업은 피폐하여 날로 국운이 기울어져 가」(조선물산공진회)기 때문에, 그것을 그림엽서나 잡지 영화등과 같은 미디어로 일본내에 소개함으로서 식민지의 유지를
위해 한반도에 막대한 재정투자를 획책하고 있었다. 이에 이국 취미(Exoticism)를 나타낸 그림 엽서는 유행을 하였고, 이를 받아든 많은 일본인들이
한반도에 호기심을 가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진정한 한국 이해」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2-2-6)그런데,
1945년 이전의 역사에 있어서, 1930년대에 갑자기 일본에서 데뷔하여 큰 인기를 얻은
여성무용가를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반도의 무희」 최승희이다. 최승희의 생애에 대해서는 정병호의
「춤추는 최승희」에 설명을 양보한다(16). 최승희는 1930년대의 일본에서「인기의 최고봉」에 올라, 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로부터도 절찬받았다(17). 그리고,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무희 최승희를「일본 제일」이라고 인정했다. 그녀는 화장품이나 연필·치약 등의 포스터에 등장해 「드물게 보는 미모. 은혜입은 육체」를 일본국내와 일본의 식민지 공간에 피로하였다. 또 최승희는 도쿄 근교 가마쿠라 해안에서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반소매와
반바지차림으로 클래식발레를 추었다. 그 모습을 카메라에 담은 사진가 桑原甲子雄씨는 「에로스의 여신」이었다고 표현하였다(18).
최승희 연보에 의하면, 인기 절정기에 있던 1937년 9월 27일, 「유럽방문을 위한 고별 신작 발표회」(도쿄 극장)를 마친 후, 1937년 12월에 구미 공연을 떠났다. 먼저 미국 대륙에 건너간 것을 시작으로 유럽의 프랑스, 스위스, 이탈리아, 독일, 네델란드, 벨기에, 프랑스 등의 각국에서 순회 공연을 계속했다.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 뉴욕을 비롯해 각지에서 공연을 성공시키고, 여세를 몰아 브라질, 우루과이, 아르헨티나, 페루, 칠레, 콜롬비아, 멕시코 등의 남아메리카 각지에서도 공연했다.
1940년 12월 5일, 최승희는 일본으로 다시 돌아오는데, 이는 태평양전쟁이 발발하기 약 1년전 일이었다. 약 140회에 걸친 구미공연후(호치신문1940년12월7일) , 일본에 있어서의 그녀의 이미지는 이미
「반도의 무희」가 아닌,
「중일전쟁 때문에 배일적 감정이 농후한 미국에 가서, 조국을 위해 조선무용을 소개한 반도의 무희 최승희」(미야코신문1938년7월27일)
였다. 현재 수중에 있는 유럽 공연의 포스터를 보면, 그녀는 일본인이 아닌「Korean
Dancer」라고 명기해 출연하고 있었다. 단지 그녀의 여권은 일본 정부가 발행한 것이었으므로 이름만은 일본식 발음인 「Sai
Shoki」로 되어있는 것에서 시대적 제약을 느낀다. 포스터에 나타나 있는 것처럼, 그녀가 연기한 것은 바로 한국 무용이었다.
「조선 무용 20여종과 서양 것을 세 개 정도 준비해 갈 생각입니다. 일본 무용 중에서도 향토무용의 소박한 것이라면 연기할 수 있을 것 같으니까 그런
것을 두 세개 정도 추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사히신문 도쿄판 1937년8월15일)
구미공연 출발 전 이렇게 말한 최승희는 덧붙여서 한국의「시골의 향토무용」도 구미 공연에서 연기하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1945년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반도에서 그래왔듯이, 최승희를 「친일파 」라고 하여 비판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다.
(2-2-7)하지만 여기서 관점을 바꾸어, 최승희가 활약한 1930년대~1940년대 일본 정세를 생각해 보자. 아이들조차도 「피었네 피었네 사쿠라가 피었네」가 아닌, 「진격하라 진격하라 군인들이여 진력하라」로 알려진 국정교과서「국어 독본」을 배우기 시작한 것은 1932년부터였다. 1931년 중일 전쟁이후, 일본은 전쟁의 길을 걷기 시작, 1937년 국민정신총동원계획과 1938년 국가총동원법에 따라 전시체제가 형성되었다. 이 법률에 의해서 국민 징용령이나 가격 등 통제령뿐만 아니라, 단체 결사의 금지, 출판 통제 등, 모든 국민 생활이 전쟁을 위해 규제되었다. 무용계에서는 1930년 일본 무용 협회가 결성되었지만,
1940년이 되어 비상체제하에서의「오락」은 금지되었기 때문에, 많은 무용 단체는 활동을 그만둘 수 밖에 없었다. 협회 자체도 그 명칭을 대일본 무용연맹이라고 개칭하고 1940년 10월부터 개시된 대동아전쟁을 위한 일환으로서
재구성 되었다. 클래식 음악만 하더라도 독일 출신의 작곡가 베토벤의 곡은 허가되었지만, 독일 이외 작곡가의 곡 연주는 전면금지되었다.
같은 시기 한반도에 있어도 지원병을 모집하는 뉴스, 영화 등을 통해「반도에 특별지원병제도 발포된지 이미 6년, 드디어 새해부터는 반도 2,400만 동포에 대해 대망의 징병령을 내릴수 있습니다 」라고 하는 나레이션이 흘러 나왔고, 1943년 3월 2일에는 병역법개정이 공포되어 동년 8월 1일에 한반도 전체에 징병제가 시행되었다.
한반도뿐만 아니라 오키나와에 있어서도 전시체제에 돌입하여, 표준어정책에 의해 오키나와 방언을 말살하고, 연극, 연극, 무용 등을 제한해 모든 오키나와색을 부정·배제하여 오키나와 사람들을 강제로 전쟁에 참가시켰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중일 전쟁이 되돌릴 수 없는 수렁에 빠진상태에서, 더욱이 1941년 12월 8일 일본군에 의한 진주만 기습공격으로 일·미 전쟁까지 시작되어, 사태는 한층 전쟁 무드가 높아지고, 이로서 일본내지와 오키나와 대만, 그리고 한반도가 태평양전쟁을 찬미하고 도구화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왜「반도의 무희·최승희」만은 그러한 사회적인 제약을 넘어서 자유롭게 조선 무용을 계속 출 수 있었을까 하는
점이다.
주시하다시피 당시 전황은 1942년 6월5일 미드웨이 해전 패배와 8월 과달카날전투 패배 등으로 악화되었으며, 1943 년 5월에는 알류샨 열도의 앗트섬에서도 일본군이 전멸함으로써 이미 일본의 패배는 결정적이 되었다. 이와 함께 일본 정부의 내무성 정보국은 신문 잡지의 통제, 및 영화·무대공연 등의 예술 활동 통제에도 착수하면서 모든 미디어 통제를 강화했다. 패전 농후한 전시상황을 보도하지 않기 위해 내무성 신문 잡지 검열관은 모든 보도의 자유를 강탈하고 진실을 보도하지 않는 거짓의 전쟁 승리기사 만이 독자에게 계속 제공되었다. 라디오방송과 더불어 극장에서 연기되던 노(能) 가부키(歌舞伎) 浪曲, 고단(講談) 라쿠고(落語) 등의 대중예술 대부분이 금지되었다. 공연 관계자가 전장에 끌려간 점도 있었겠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전시하에서는「전쟁 수행에 불필요한 연극」활동은 사람들로 부터 격리를 시키던지, 도구화되었던 것이다. 쇼와시대 최대의 만화영웅「노라쿠로」(田河水泡作、 잡지『少年倶楽部』게재、講談社刊)가 「싸우는 만화」로 변했던것 처럼.
(2-2-8)이러한 사회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아사히 신문」1942년 12월 3일호를 예로 들면, 바둑 대국보(7단 혼닌보전)와 최승희 관련 기사를 제외하면, 전기사가 태평양전쟁을 찬양하는 기사였다.
「예능소식: 최승희·독무 공연6일부터 14일간, 반도의 무희, 최승희는 6일부터 20일까지(8일 휴연) 14일간 제국극장에서 독무 공연을 개최한다. 이상과 같이 장기 공연을 단독으로 개최하는 것은 우리나라 최초의 시도로서 주목받고 있다. 14일간의 공연일정중 다음과 같이 종목이 4회 변경됨.
제1회 곡목 (6일-11일 매일저녁 7시, 8일 휴연)
제2회 곡목(12일-음력 16일 밤 매일저녁 7시)
제3회 곡목 (17일-20일 매일저녁 7시
제4회 곡목 (12일, 19일 마티네 후 2시)」
이 기사의 바로 옆에는 전쟁에 협력하는 연재만화「후쿠짱」이 그려져 있지만, 반도의 무희·최승희는 전쟁과 전혀 관계가 없다. 거기에서는 군화의 발소리는 전혀 들려 오지 않고, 또 직전의 미드웨이 해전이나 과달카날섬 패배 등은 다른 세계 이야기인양 최승희만이 전쟁에서 격리되어
있었다. 덧붙여서 팜플렛에 기록된 제1회째 의 곡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제1부
1. 세 개의 전통적 리듬(조선의 고전 무용의 세 개의 기본적 움직임을 체계화하여 창작한 춤)
2. 구슬피리의 곡(동양의 전설에 기초한 춤)
3. 화랑의 춤(화랑이란 화려하고 용감한 젊은이의 별칭)
4. 추심(일본의 能楽『隅田川』『藤戸』를 힌트로 한 창작)
5. 보현보살(헤이안 시대 보현보살상에서 받은 느낌을 무용으로 표현)
6. 산조(가야금의 독특한 산조 형식의 5개의 리듬에 의한 춤)
제2부
1. 武魂(能楽의 무용적 수법을 도입한 창작 무용)
2. 艶陽春(부드러운 봄빛을 맞으며 흥에겨운 모습을 표현한 것)
3, 明妃曲(한나라의 昭君의 슬프고 애틋한 모습을 무용으로 한 창작)
4, 草笠画(소년 화랑의 즐거움이 넘쳐나는 순진한 모습)
5, 칠석의 밤(전설「칠석」을 모델로 하여 창작한 무용)
6, 장고춤
이미 패전이 농후하던 1944년 1월29일자「아사히 신문」에서는 한층 더 최승희 관련 기사가 이색적으로 느껴진다. 이 날자의 신문은 전체가 전쟁관련 기사로 구성되어 있다. 라디오 프로그램마저도 오전 5시40분부터 오후 7시 40분까지의 전프로그램이 애국, 근로, 정신, 전장에 관한 내용으로 되어 있다.
유명한 여류 작가 野上弥生子「동심 애호 - 공습에 의한 人口피난과 학동문제의 문제」라는 기사와 「전쟁시 필시 휴대물품: 항공전의 그늘의 힘」, 「식량부를 만들자」등의 기사에 둘러싸여 부자연스러운 기사가 실려 있다.
「최승희의 신작 : 약 4개월간의 북·중지나 여행에서 돌아온 최승희의 신춘 공연은 지나극의 전통적 기법에 사용한 몇 개의 신작을 제공하고 있다. 満宮秋月」에서는 분명히 새로운 표정을 하고 있고, 「묘■」라는 춤에서는 심리적인 음영의 아름다움이 인상적이지만, 총괄적으로 평하자면 너무 소묘적이라 할것이다. 조선 무용의「산조」에서는 발랄함이 살아있고 수작「생지」는 이번 상연 목록에 있어서도 유일한 「작품」이다. 너무 소묘적인 표현보다도 작품을 만드는 것에 경주 해야 할 것이다.
아무튼 최승희가 새로운 동양 무용을 만들기 위한 기법적 소재를 지나에서 찾은 것은 현명한 판단이었으며, 그녀의 경우, 특히 적격자이기에 아시아 예능의 전통의 방향을 기대하고 싶다.제국극장, 2월5일까지---光吉夏弥기자)」
한층 더 수수께끼 같은 것은 한반도에 있어「조선색 말살 캠페인」이 강력하게 진행하여, 황민화 정책과 창씨개명 운동(1940년의 조선민사령개정), 일본어 상용운동, 내선일체화 운동이 강력하게 전개되던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제국 안에 있는 도쿄, 그것도 천황이 거주하는 황궁을 마주보는 곳에 위치하고 있던 제국극장에서 조선 무용의 명수 최승희의 공연이 개최되었다는 것이다.
더구나 1944년 1월 27일부터 2월 15일까지의 20일간 23회의 장기공연은 일본인들에게 조선 무용의 우수성을 보여주는 것 뿐만아니라, 조선 민족에 대한 존중을 환기시키는 것이었다. 덧붙여서, 이 최승희의 무대를 본 나카노 시게하루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춤이라고 하면 나는 최승희의 마지막 일본공연을 보았다. ~~(중략)~~그것(「조선 민족 무용」: 필자주)을 보고 조선인관객들은 크게 기뻐하고 있었다. 저, 양쪽어깨를 설렁설렁 흔들 때, 객석의 조선인 남자 여자 아이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눈물을 글썽거리며 기뻐했고, 그 날 그들은 한복을 입고 있었다. 그 때의 일은 지금도 선명히 기억하고 있다. (19)
패전이 가까워져 우울한 기분을 불식하기도 하고 국민의 전의를 높이기 위해 모든 미디어와 예술 등이 전쟁 수행의 도구로 총동원되었지만, 최승희의 무대 객석에서는 한복 입은 사람들이 진을 치고 앉아 열렬한 성원을 보냈다고 中野重治는 남기고 있다. 또 高嶋雄三郎도 최승희의 제국극장공연에서 조선인의 성원과 공감하는 풍경이 생각난다고 한다.
(2-2-9)이 수수께끼, 즉 왕궁을 마주보는 제국극장에서 조선인들이 스스로의 Identity를 재확인하는 것이 허락된 수수께끼는 능력없는 필자로서는 무겁게만 느껴지는 과제이지만, 전시하에 있어서의,
1, 영화「綴方教室」(원작・豊田正子 감독 山本嘉次郎、주연 高峰秀子1938년 제작)에서 보여지는 조선인 여성이 등장하는 일상적인 풍경 씬
2, 시나리오「춘향전」(村山知義저、『文学界』1939년1월호수록)의 공표
3, 아쿠다가와상 후보작이 된 김사량의 소설「빛안에」((1939년、『文芸首
都』게재)---1940년 후보작으로서 각광을 받아 조선인의 고뇌가 표현되어 그것을 일본인 독자에게 제공한 것.
4, 사진가 安井仲治・堀野正男이 촬영한 사진에 투영된 시선, 사진에 잘려진 재일 조선인
등에 주목한 有馬学 논고에서 우리는 그 수수께끼를 푸는 열쇠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리마가 지적하듯이,
「전시에있어서의<조선>과<조선인>발견은「마르크스주의와 모더니즘을 수용한 사고를 통해 처음 인식된 <조선>이다.」 (有馬学,「전시기 일본 모더니즘과 식민지에의시선-발견된조선」『「昭和20년 8월15일 식민지 종언과 조선해방의 역사상 재구축(헤이세이 18년도 과학연구비 보고서、연구대표자 松原孝俊、pp 111-122、2007.3月).
(2-2-10)필자는 有馬学 분석 시점을 전면적으로 채용하여 반도의 무희·최승희에 초점을 맞춰, 전시체재하에서 조선 무용의 예술성을 발견한 것은 마르크스주의와 근대 모더니티의 시선을 가지고 있던 村山知義와 朝日新聞記者 光吉夏弥 등에 의한 것이라고 말해 두고 싶다. 만약 이러한 시선이 없었다면, 초토화된 동경의, 그것도 천황의 권위의 대본산인 황궁을 마주보는 제국극장에서 최승희의 조선 무용공연 등은 기획되지 않았을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물론 내무성 정보국 소속 검열관의 깨닫지 못했다고도 말할 수 있겠지만, 그 보다는 투옥·고문도 무서워하지 않았던 최승희의 용기와 예술에 대한 정열을 높이 사야 할 것이다.
제3 절 일본인이 본 한국 무용 : 1945년~1965년
|
Point : 1, 재일 Korean(주로 조총련)의 문화 활동 2,
재일 Korean에 의한, 재일
Korean을 위한 조선 민속 예능---Identity
확인 작업 |
(2-3)지금에 와서는 믿기지 않은 이야기지만, 패전 후 일본에서는 조선 민족 예술단이 활발하게 예술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조총련 설립 직후, 1955년 발족한 재일 조선 중앙 예술단은 재일 코리안의 정신적 지주를 무용으로 표현하기 위해서 활동을 일본 전국에서 전개하였다. 1974년 금강산 가무단이라고 개칭한 무용 집단은 재일 코리안의 민족 통일이나 민족의 긍지, 조선 민족의 탁월한 문화 활동에 재일 코리안의 꿈과 희망을 담아 무용공연을 계속했다고 한다. 그런데, 금강산 가무단의 공연은 연기자나 관객의 대부분이 재일 코리안이었으며, 그 목적도 재일 코리안의 아이덴티티를 유지, 강화, 기초 다지기를 위한 것이었다. 북한 정부가 필요로 했던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침투시켜 재일 코리안을 통합하기 위하여
각종 문화 활동이 총동원되었다. 즉 다시말하면, 금강산 무용단 등이 제공하는 한국 무용의 습득, 감상 등은 북한 정부가
제일 코리언을 관리하기 위한 이데올로기 장치였던 것이다.
따라서, 이 시기(1945년-1965년의 20년간)에 일본인들이 한국 무용 공연을 관람 할 기회는 거의 없었다.
제 4 절 : 일본인이 본 한국 무용:1965년부터 2000년
|
Point : 1, Tourism과 한국 무용: 고대로의 「원형찾기」와 「가장 개발에 뒤처진 민속촌」에서의 공연
2, 일본인의 한국 여행 목적
|
(2-4-1)반복해서 설명할 필요는 없으나 확인하는
뜻에서 말하자면 전후 일본인이 한국 무용을 다시 보게 되는 것은 1965년12월 18일, 한일 기본 관계 조약이 발동되어 양국의 국교정상화가 이루어 진 후였다. 일본의 해외 여행 자유화는 1964년 4월이었지만, 한일간에 국교가 없었기 때문에 방한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패전 후의 20년이란 시간은 대다수의 일본인이, 무용가 최승희라는 이름과 한국 무용을 충분히 잊을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한국 전쟁 발발로 인해 일본내 특수 붐이 발생하여, 일본 경제는 부활했다고는 하지만, 한국여행과 같은 해외여행은
꿈같은 이야기였다. 국내 여행이라고 해도 도쿄 근교의 아타미 온천, 혹은 신혼 여행의 메카로서 유명해진 미야자키 지방이 사람들사이에 주목받기 시작했을 뿐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하물며 한국 관광 여행을 가는 일본인은 소수였다. 당시 정부 통계에 의하면 연간 1만명 이하였다.
외화 획득을 목적으로 한 외국인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서, 1962년 한국관광 공사의 전신인 국제관광공사가 한국에 설립되지 않았다면 일본인이 한국 무용을 보게 되는 것이 훨씬 더 늦어졌을 지도 모른다. 한국을 방문한 외국인 관광객은 1968년에 10만명인 것에 비해, 10년 후에는 100만명에 도달했다.
1970년 7월 7일, 약 475㎞의 경부고속도로가 전선 개통을 한 것에 이어, 1971년에 경주 보문 관광 단지의 건설을 시작으로, 부산-경주-부여-서울이 직선으로 연결되어 관광 인프라가 정비되었다. 1978년의 외국 관광객 100만명 중 일본인이 몇 퍼센트 차지하는지 불명확하나 반수 이상을 차지한 것은 틀림없다.
1972년 발굴된 일본 다카마쓰(高松)총 고분에서 화려한 고분 벽화가 발견되고 그 벽화에서 다수의 한반도에 관련된 문화적 계보가 발견된 것을 계기로 한반도에 대한 일본인의 관심은 크게 달라졌다. 사실 그동안 이승만 라인(1952년에 설정, 한국에 의한 일본 어선 출입 금지선)에 따른 한국 이미지, 또는 북한을 예찬하며 쓰여진 寺尾五郎의 「38 도선 북쪽」(신일본출판사、1961년)의 베스트셀러화와 더불어 한국보다 북한이 「낙원」이미지를 가지게 되었고, 이에 호응하는 형태로서 매스컴은
박정희의 「독재 정권」을 비판함으로서, 적어도 일본인 여성이 좋아하는 외국 여행 방문국의 톱 10에 한국이 들어간 적은 없었던 것이다.
또한 1970년을 전후해 「기생여행」이라는 이미지가 강했던 탓이었을까, 일본인의 한국 여행 붐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상술한 것처럼, 다카마쓰총 고분벽화를 계기로 「한반도는 일본 문화의 원류」라는 이미지를 만들게 되었다. 이러한 풍조에 편승하여, 한국관광공사와 일본의 대기업, 신문사들이 협조하여, 한국 각지에서「한일 고대사 심포지엄」등이 개최되었고, 일본으로부터 수만명의 고대사 팬이 방한 하였다. 오사카의 사천왕사와 유사한 경주의「불국사」, 백마강 전투에서 멸망한 백제의 비극을 연상시키는 부여「낙화암, 그리고 한반도로부터 귀화한 진씨 일족의 명복을 빌기위한 목적으로 세워진 쿄토의 太秦寺에 소장된 서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미륵보살반가상」과 비슷한 불상등은 유사•연상•동일이라는 이미지를 일본인에게 전달하며, 일본인 고대사 팬들을 매료시켰다. 1981년 일본의 마이니치 신문이 주최한 한국 고대사 여행을 예로 들면, 일본 각지로부터 참가한 여행 객 수백명이 서울에 집합하여, 우선 시내 남산 기슭에 있는 한국의 집에서 전통요리와 전통 무용을 즐긴 후, 그룹별로 서울→부여→경주를 둘러보고, 마지막에는
경주의 호텔에서 개최된 일한 고대사 심포지엄을 방청했다고 한다.
(2-4-2)그런데, 필자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한국전통무용은 언제부터 외국인 관광객 대상 Diner show등의 프로그램에 추가된 것일까 하는 것이다. 역시「한국의 전통요리, 민속음악 및 무용, 고전적인 혼례 등과 같은 복합적 전통문화공간」을 제공하기 위해 건축된 한국의 집 개관이 1981년이였다는 점을 간과 할 수 없다. 경복궁을 모방한 한옥에 병설된 민속극장에서 매일 외국인 관광객을 대상으로, 시나위나 부채춤, 살풀이, 판소리, 북춤, 봉산가면극 등이, 한국 문화재보호재단(1980년 설립, 문화 관광부 산하)에 의해서, Package 관광 상품화되어 일련의 한국「전통문화」를 정기공연되었다. 관광을 위한 전통문화의 자원활용모델은 외국에서 도입된 것이었지만, 이로서 일본인 관광객이 한국적 전통과 한국무용에 용이하게 접촉할 수 있게 되었으며, 한국 무용이 일본 내에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환언하자면, Tourism과 한국무용이 결합한 순간이기도 하였다. 한국 정부에 의한 외화획득 정책이 시작되면서, 한국문화의 「문화 관광」이 추진되는 것과 동시에 「한국전통 문화의 부흥」이 사회적으로 강하게 주장됨으로서, 한국무용의 전통성의 보존과 재활성화가 요구되었다.
여기서 필자가 관심을 갖는 것은 한국의 집에서 연기된 한국무용의 예술성도 아니며, 또 누가 연기했는지 하는 것도 아니다. 필자가 관심을 갖는 것은 한국 정부가 제시하는「한국의 전통」이란 무엇인가하는 것이다. 한국의 집에서 제공된 음식•음악•무용•건물•서비스•선물을 통해 「한국의 전통이란 무엇인가」를 추측할 수 있는 단서가 제공되었다. 즉, 외국인에게 제공된 1980년대의「한국의 전통 무용」이란 「외국인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욕망의 소산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외국인의 시선에 민감히 반응한 결과 만들어진 것이 한국의 전통문화였던 것이다.
(2-4-3)여기서, 필자는 1970년대부터 90년대에 이르는 한국민속문화 정책의 추이를 되돌아 보려고 한다. 그것은 한국정부에 의한「한국 전통 무용」의 체계화와 부합되기 때문이다. 오해를 각오하고 이상의 30년간을 총괄하자면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할수 있을 것이다.
1970년대: 「새마을 운동」(Local 문화의 변용과 전환점)
1980년대는「지역 축제」(Local 문화의 창조)→Tourism와 합치하는 민속 예능의 관광 상품화
1990년대는「한국 문화의 세계화」(국민 문화 창출)
신호에 의하면「1960년대 이후, 한국 사회에 있어서의 특징적인 사회 현상의 하나는, 「향토 문화 」라고 하는 새로운 문화 포메이션의 탄생이다. 1948년, 신생 국민 국가로서 탄생한 한국은, 한국 전쟁이나 이데올로기의 대립이라고 하는 사회의 혼란을 넘어 196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국민 통합과 근대화 정책을 추진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그 수단의 하나로서 이용된 것이 향토 문화제였다」라고 지적하는데, 거의 정답에 가깝다고해도 좋다.
2-4-4)첫째로, 1970년대에 한국 전국토에서 전개된「새마을 운동」을 되돌아 본다.
지금에 와서는 믿기 어려운 이야기가 되어버렸지만, 1961년 7월, 박정희 소장이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으로 취임했을 당시(1962년 12월 신헌법 공포<제3 공화국>, 63년 10월의 민정 이관 대통령 선거에서 제5대 대통령 취임), 일인당의 국민소득을 비교해 보면, 한국은 필리핀보다 빈곤했다. 그리고 1965년은 한국이 베트남 전쟁에 참전을 한 해이며 한일 평화조약을 체결한된 해이기도 하다. 또 한국 경제학사의 교과서에 기술되어 있듯이, 한국의 경제발전은 1965년 이후이다. 박정희는 그후 대통령으로 취임하여 빈곤극복과 경제의 재건, 공무원 부패추방등의 근대화에 착수해, 1962년부터 제1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실시하였다. 하지만 역시 박정권의 가장 큰 역사적 전환점은 1970년부터 전개된 농촌 근대화를 위한 새마을운동이었다. 그 당시의 전국의 농촌은 소작제도의 잔존, 농업규모의 영세성, 농촌의 방대한 잠재적 실업자의 존재 등, 많은 문제가 가로 놓여 있었다. 이에 미래의 한국경제에 있어서 기간적인산업으로서 농업•어업이 차세대에게 계승되는 것을 기대하며, 농업의 체질강화를 추진해 효율적이며 안정적인 농업 경영에 의한 생산 전개의 기초조건을 정비하기 위해서, 대통령 명령에 의한 대책(세마울 운동)이 중점적, 가속적으로 실시되었다. 슬로건은「근면, 자조, 협동」이었으며 행정주도에 의해 새마을 운동은 전국적 규모로 전개되었다.
그리고,
①소득 격차의 해소와 농어업 경영 소득 안정,
②근대화 정신의 계발과 정착,
③농어촌의 생활 환경의 개선, 도로등의 인프라 정비
를 목표로 하여, 정부자금이 주입된 것이었다. 이 국가적인 프로젝트는 농촌개발의 성공예로서 국제적으로도 유명하다.
필자가 보고 들은 1970년대초 경상북도일대의 농촌은, 날이 지나면 지날수록 마을내의 도로가 개량 보수되고, 초가지붕이 기와, 슬레트지붕으로 바뀌고, 새마을 창고의 건설을 위한 작업들이 행해지고 있었다. 뿐만아니라, 마을내의 의식개혁운동이 전개되어, 전근대적 정신이라는 명목으로「미신」으로부터의 탈피라든가, 무당 추방운동 등도 실시되고 있었다.
고수입형 산업의 전개을 꾀하기 위하여 기계화의 촉진, 신품종 신재배법 신규작물의 도입이나 농지관개시설의 정비, 작업의 능률화/쾌적화등에 의한 고품질 고효율의 생산체계의 확립등이 적극적으로 추진되었다.
그 결과, 농촌의 많은 부분이 크게 변모하였고, 당시까지 지배적이었던 벼농사 중심의 생활패턴이 변화하여, 재래 생활형태는 급속히 파괴되었다. 특히, 경부고속도로변 농가들은 우선적으로 저금리 주택융자를 받게 된 덕분에, 다양한 색채의 도시풍 현대주택으로 변모되었고, 한옥도 시멘트구조를 기본으로 한 한옥풍 가옥이 들어서게 되었다. 즉 외국인 관광객을 위한 「한국 전통 문화」Display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2-4-6)한편, 1970년대 박정희정권은 적극적인 외화 기술도입정책이 전개하고 수출주도형정책으로서 [한강의 기적]이라고 불리우는 고도성장을 실현하고, 마산과 구미 등에 공업단지를 건설하였다. 이에 사람들은 현급 수입을 찾아 마을을 벗어나 도시나 공업단지로의 이주가 이어졌다. 도시의 고용기회가 확대됨에 따라 고수입형 농촌경영의 꿈을 포기한 젊은 층의 도시집중화 현상이 발생하였고 이는 농촌의 과소화와 노령화를 가속시켰다. 이 시기 60세 이상 농림수산업 취업자 수는 63년과 65년 사이 5.1%였던 것이, 78-80년에는 10. 6%가 되었으며, 50세 이상은 18. 5%에서 30. 5%로 증가하였다. (20)
공업화사회의 도래는 정부조직을 거대화하고 거대기업의 등장을 초래하였으며, 정부와 기업은 적극적으로 농촌유출인구(탈농=세대유출)를 흡수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농촌노동력의 도시유출은 당연히 농촌에 심각한 노용력의 부족과 고령화현상을 가져왔던 것이다. 1970년대후반이 되어 농촌에서는 농번기 일손부족 현상을 가져왔다. 이는 1960년대까지 농촌의 과잉노동력문제가 정부의 골치거리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짧은 기간동안 농촌에 얼마나 많은 변화가 있었는지를 알수 있다. 1985년 당시, 서울, 부산, 대구, 인천, 광주등, 5개도시의 인구 배율이 전국인구의 43.7%를 넘고 있었다. 1967년의 동일5개도시인구비율이 17.4%였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도시집중비율의 증가는 경이적이다. 사실 공업화의 진전과 함께 이농인구가 도시 또는 그 주변에 집중하는「과잉 도시화」(Over-urbanization)현상은, 마닐라, 쟈카르타, 방콕등의 예에서도 확인되는 현상이기는 하지만, 한국의 도시집중율은 경이적이다.
(2-4-7)이렇게 하여, 가족/친족관계가 각지에 확산되고, 근무시간에 구속된 봉급생활자가 나타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적 변동에 의해, 그 동안 농촌에 기반을 둔 생활스타일과 의식이 변화되었고, 각 개인이 각자의 주관적 만족으로서 행동을 하게 됨으로서 가치관의 다양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더구나, 여성의 사회적 진출이 활발해지고, 여성의 권리에 있어서도 많은 부분이 인정을 받게 되었으며, 이로써 가족의 역할도 변화하게 되었다. 전통적인 선조제사를 지내는데 곤란이 발생하였다는 것은, 그 상징적인 예일 것이다.
더구나, 공업화와 도시화가 진전된 한국사회에서는 「사람들 모두가 바빠졌다는 것」이다. 사람들의 가치관도 크게 달라져 한국경제가 고도성장을 일구어내는 과정에서, 토지와 주식은 중장기적으로 반드시 오르는 것이라고 하는 「토지와 주식신화」가 만들어졌고, 또 소비수요는 반드시 확대된다고 하는 「소비확대신화」등이 등장해, 점차 머니게임에 흥청이는 도시민이 출현하므로서, 1970년대이후의 한국적 상황은 1960년대까지의 척도로서 측정불가능할 정도로 한국사람들의 의식은 크게 변화하였다.
고향집의 안방에서는 할머니가 손자손녀에게 전해주는 옛날이야기가 들리지 않게 되었으며, 가끔씩 걸려오는 전화수화기를 통해 손자손녀의 목소리를 듣게 되었다. 또 각 지역의 향토문화(Local문화)는
크게 변하였다.
필자는 농촌에서 도시로 인구가 이동함으로서, 농촌의 과잉노동력문제가 해결되고, 농촌의 소득수준이 상승하기 시작하는 1970년대를 「Local문화의 전환점」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2-4-8)두번째로 1980년대부터 활발해진 「지역축제」로 시점을 바꾸어 보자. 우선 전국 각지에서 벌어지고 있는 향토문화제의 현황을 2006년 문화관광부 조사를 기준으로 제시하면 726의「향토 문화제」가 행사되어지고 있다고 한다. 이하는 1970년부터 2006년까지의 36년간의 추이를 간략하게 집계한 것이다.
축제수의 변화
|
연도 |
1970 |
1977 |
1986 |
1999 |
2006 |
|
축제수 |
57 |
77 |
229 |
422 |
726 |
<작성: 신확(申鎬)>
필자의 관점에서 정리하면, 향토문화제는 다음과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다.
1)지역사회에 있어서의 전통문화의 재발견, 보호, 육성, 재정립 ― 국가에 의한 전통문화의 관리.
2)정부에 의한 전통의 재창조와 자민족 문화의 과시 ― 일본식민지에 의해 한국의 전통문화가 파괴되었기 때문에.
3)민족적 아이덴티티구축 ― 신라문화재, 삼일문화재등의 명칭에서 알수 있는 것처럼 역사성과 순수성의 제시
이상과 같은 필요성에서 정부는 옛부터 전래되어 온 것이라고 믿고 있던 토착 문화를 무형문화재로서 지정하고 많은 보조금을 투입하는 등, 지역축제를 보호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행하였다. 다른 한편에서는 문화재위원이 중심이되어 많은 민족문화재를 창조하였으며, 더구나 그것을 문화재로서 지정하기도 했다는 것 또한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결국 무엇이 전통문화인가를 거론하는 것보다 한국사회에서 어떠한 문화사상이 전통문화로 인식되어 가는가 하는 전통문화의 정착과정에 주목하는 것이야말로 현실의 한국사회를 파악할수 있는 길을 제공해 줄것이다.
상기의 특징을 참고로 하여 한국의 향토문화제의 특징적인 면을 몇가지 더 이야기 해 보면 다음과 같은 것들을 지적할 수
있다.
4)국민문화를 구성하는 제지역문화의
발견에 공헌하는 것.
5)타지역 이해에 도움이 되고
나아가 지역대립감정을 완화할 수 있다는 것.
6)1961년 8월에 재정된 관광산업진흥법이후, 관광산업의 상품화에 활용가능
하다는 것.
7)타문화와 차이를 제시하면서
이것을 적극적으로 선전하여 외국인관광객유치에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것.
(2-4-9)특히 필자와 같은 일본인에게 있어서는 각종 출판물이나 텔레비젼광고를 통해 선전되는 이러한 지역축제는 한국의 이미지를 형성하는데 강한 영향력을 가진다. 그 구체적인 사례를 제시해보자. 충청남도 부여시에서 10월에 개최하고 있는 「백제문화제」가 일본에서는 다음과 같이 소개되고있다.
「백제문화제: 고풍적인 행렬에 백제왕조의 꿈과 로망이 피어난다. 일본문화의 원류라고 말해지고 있는 백제문화. 그 부흥을 위한 충청남도 최고의 행렬에서 화려한 역사적풍경을 즐길수 있다. 백제왕비와 공주선발대회, 백제육왕의 추모식, 신성한 색깔의 의상과 당시를 생각케 하는 가마가 볼거리인 왕족의 행렬, 불꽃놀이, 궁도대회가 유명하다」(21)
여기에서 백제왕비의 의상이나 백제인에 의한 퍼레이드가 현대인이 만들어낸 창조적인것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오히려 백제문화를 「관광자원화」 함으로써 국내외의 관광객에게 다른 지역과 차별화를 꾀하고 그 이미지를 정착시킴으로써 집객력을 높이려고 하는 문화생성과정의 현실적인 의도에 주목해야 할것이다. 위에서 소개한 관광팜플렛에 명확하게 기재되어 있는 「백제문화 그 부흥을 위한 충청남도 최대의 행사」라는 문구에서 행정측이 의도하는 「전통회귀형지역진흥책」이 결국 「전통문화의 부흥」=「전통문화의 창조」를 유발하였다는 것을 충분히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일주일간의 짧은 관광행사라고 할지라도 행사에 투입된 정부등에 의한 공적보조금이나 관광수입은 지역경제활성화를 이룩하는 윤활유가 되고 있다. 더욱이 지역진흥책의 일환으로서 다양한 민속행사나 역사적지식을 관광자원화 하면서 사람들은 지역적일체감을 다지고 사회적 통합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다. 또, 그것은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육의 장이 되기도 한다.
더욱이 강조해 두고 싶은 것은, 전술한 것 처럼, 1985년에 벌써 5대도시의 인구집중비율이 전인구의 50%에 가까웠다는 것은 생각하면, 고향상실자들이 도시에서 농촌에 일시적으로 귀향하여, 농업적 삶과 농업력을 즐길 수 있는 감각을 지역축제가 제공하고 있다. 그것은 노스텔루지아를 제공하는 장소이기도 하며, 더욱이 이농자의 자식들에 있어서는 부모들에게 들은 「고향」, 또는 그림책에서나 본「고향」을 체험하는 역할도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원래 지역축제라는 명칭은 중심(도시) – 지역(농촌)의 대립관계를 전제로 하고 있다. 따라서 이 용어가 생성되는 사회적 배경에 도시(중심)의 출현은 필요불가결한 것이라고 생각 했을때, 이 용어의 사회적 생성자체가 한국사회의 변화를 대변해주는 하나의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
또한 신호는,
196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한국사회의 문화적 변화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1958년부터 시작할 수 있었던 민속 예술 경연 대회, 문화재 지정, 향토 문화제의 탄생 등, 「민속」이라고 관련이 있는 여러가지 사회적인 움직임에 민속학자가 적극적으로 참가하면서, 「근대」로 도정으로 나아가는 가운데, 토착적인 생활의 지식에 대한 기억이 멀어지고 있던「민속」의 담당자에게, 「민속」에 대한 지식을 제공하는 형태를 취하게 되었다」(2 2)
(2-4-10)1995년 지방자치제의 본격적인 시행을 계기로 하여, 지방자치단체는 지역활성화 정책의 일환으로서 관광사업에 적극적으로 관여하게 되고, 이로써 관광자원과 문화자원의 개발이 행해지게 되었다. 「1994년의 한국방문의 해」등과 같은 국가의 정책적인 추진도 있었지만 다른 원인으로서 이하 열거하는 이유들을 생각할 수 있다.
1)마이카시대에 도래 ― 전국 5시간시대가 실현되므로서 집객능력이 높은 관광자원이 필요해졌다는 것― 한국의 재발견.
2)지역의 고유성,독자성의 창출.
3)지역홍보를 위한 축제의 급증.
4)일본의 오이타(大分)현이 제창한 1촌1품운동의 도입에 의한 지역별 상품가치의 개발등에 의해, 향토문화의 전람회역할을 하던 향토문화재는 급속히 지역축제로 변모하게 되었다.결국 보는 축제였던것이 구입하는 축제로 변화하였고 나아가 체험하는 축제로의
변화는
피할수 없는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
(2-4-11)20세기말, 문화시장의 메카니즘에 정부가 과잉개입이라할 만큼 강력한 규제와 특전을 부여한 결과, 전국의 지역축제중에서 상품화된 향토문화는 그 후 「진열장」에 장식되고 화려하게「Display」되므로서 새로운 형태와 구조가 정착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향토문화가 사회적으로 전통문화로서 인정받고, 국민문화로 거듭나는 데에는 많은 시간을 요할 것이다.
(2-4-12)여기서 지적해 두고 싶은 것은, 197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의 한국 정부의 문화정책은 「문화 육성--문화 보호」로 전환되었다는 것이다. 즉 이러한 정치적 문맥 속에서 한국무용의 세계도 재발견과 재구성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하지만 일본인 관광객의 입장으로 보면, 그러한 한국 정부에 의한 「문화 육성--문화 보호」정책의 강화는 한국 무용공연장과 일본인 사이가
멀어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제3부 글로벌 시대에 있어서의 한국 무용에의 기대
(3-1)이제까지의 필자의 논의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20 세기말 동아시아의 문화상황은 정부의 강력한 리더쉽을 바탕으로 국민국가 형성하기 위해서 보도관제나 음악·영화등의 수입 제한과 매스컴등을 동원하여 서로 완고한 벽을 만드는데 노력을 경주 해 왔다. 전쟁에 의해서 피폐한 산업이나 사회적 근대화를 추구할
때, 국민적 아이덴티티의 확립을 지향하였고 이로서 국민에 대한「문화의 주입」을 필요로 했다. 특히 국가의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침투시키기 위한 수단으로서도 각종 문화가 동원되었다. 바꾸어 말하면, 국가적 아이덴티티 구축과 국가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자민족문화의 순수배양을 열망했던 시기가 20 세기 후반이었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2중구조의 문화 도식이 형성되었다.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지 이미 반세기가 지났다. 그동안 동아시아에서는「모든 나라가 국민 국가를 형성해, 국민 문화가 형성 되는 것이 당연하다」라고 하는 사회적 과념이 일반화되었다. 그리고 국민 문화는 가능한 한 타민족과 차이를 나타내는 것이라는 것이 대전제가 되었다. 바꾸어 말하자면, 「문화는 민족을 특징지워주는 부정할수 없는 증거」라는 언설을 성립시켰다. 예를 들자면, 박정희 대통령 시대에 건립된「이순신」을 모시는 건축물이 그 전형적인 사례일 것이다.
그런데 21 세기에 들어, 「글로벌화」의 물결 속에서 다문화주의에 의해 「복수 문화」가 주창되고 있다. 이는 각 민족의 문화를 국가단위를 바탕으로 고립적으로 파악하는 문화관을 비판하고, 상호 교류의 어스펙트로서 문화를 재고찰하려는 입장에서 대두되고 있다. 또한 동시에 컬츄럴 스타디즈가 강조하는 것처럼, 서양중심의 문화관을 비판하고 비서양 문화이해에 더욱 폭넓은 이해를 구하는 입장에서 주장되고 있는 것이다.
(3-2)여기까지 쓰고나니 더욱더 생각나는 것은 전시체제하에서의 최승희의 무용활동이다. 물론 그녀가 일본에서 활동했던 1930년대부터 40년대에는 「Global
」이는 말도 개념도 없었기 에, 그녀는
Globalism과는 아무런 관련성이 없다. 하지만, 한반도뿐만 아니라 일본·중국·미국·유럽, 그리고 남아메리카에서 공연활동을 전개한 최승희의 다이나믹한 행동에 우리는 주목해야 할것이다. 누구도 세계를 대상으로 그녀 보다 앞서서 무용활동을 전개한 사람은 없었다. 이러한 의미로 최승희의 무용 활동은 시대의 선구적 존재였다. 다만, 그녀를 신격화하지는 말아 주었으면 좋겠다. 칭찬과 비판을 함께 받으며 살아온 그녀의 인생이기도 하거니와, 특히 1945년 이후의 사실들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면도 많기에 전후의 그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기로 하겠다.
무용가는 활자로 예술성을 설명한다든가, 무용의 스타일을 기록 하는 것보다도 중요한 것은 공연활동에 정력을 쏟는 것이다. 일반적인 무용가의 인터뷰에서는 「공연 활동이 모든것을 이야기 한다」든지 「공연에서 보여주겠다 」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사실 무용가를 평가하는 것은 공연활동이며, 이로서 최승희의 평가는 더욱 곤란해 진다. 왜냐하면 최승희의 경우, 평가를 가능하게 하는 공연기록 자체가 거의 남아 있지 않을 뿐아니라, 두번다시 그녀의 공연을 볼수 없다는 점에서 그녀의 재평가는 불가능에 가깝다.
현재 남아있는 최승희와 관련된 자료는 공연 팜플렛이나 신문 기사, 공연평등이 전부이다. 또 그녀와 관련된 대다수의 화상정보는 사진이며, 동영상은 아주 적다. 따라서 공연 그 자체의 평가는 매우 어렵운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섬세한 미의식을 소설화하고, 후에 노벨상을 수상한 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동시대평에서 다음과 같이 최승희의 춤의 특징을 파악하고 있다.
「최승희는「에헤야·노아라」와 「엘레지」를 춤추었다. 「에헤야·노아라」는 그녀가 내지에서 보여준 최초의 조선무용이었다. 내가 그녀를 처음 본 날, 수십의 무용중에서 나에게 가장 강한 감명을 주었다. ~~(중략)~~최승희의 조선 무용은 서양춤을 추는 일본의 무용가에게 민족의 전통에 뿌리를 둔 춤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었다」
「민족의 전통」에 뿌리를 둔 「힘」이야 말로 최승희무용이 높은 평가를 받는 이유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최승희의 무용은 강한 메세지를 전달하고 있다는 것을 간파하고 있었다.
「신무용의 작품 중에서 나는 「엘레지」, 「인도인의 비애」, 「황야를 간다」, 「폐허의 자취」등을 보았는데, 이들 제목은 과연 무엇을
표현하고 있을까?」(23)
川端는 거기에서 인도인이 아닌 조선 민족의 엘레지와 비애를 찾아내고, 그녀의 심상풍경에 자리잡은 「황야」를 슬퍼한다. 그리고 중일 전쟁의 수렁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어두운 세상」이 아니라, 「천혜의 체형과 재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세상에서 살게 하고 싶다」며 문장을 마치면서, 언젠가는 찾아 올 전쟁없는 세상에서 다시 조선 민족의 전통에 뿌리를 둔 무용가로서 활약해 주었으면 하는 기대를 표명하고 있다.
전시기의 일본에 있어서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기수였던 村山知義는
「나는 그녀(필자주:최승희)의 춤에서, 일본의 무용의 그것들(필자주:일본식 움직임, 일본식 형태, 일본식 리듬, 일본식 치장)의 멍에로부터 자유롭고, 더구나 먼 옛날 대륙 예술을 반도에서 일단 덥혀서 이 섬나라로 전달해 준, 즉 말하자면 우리예술의 모태를 가진 춤을 보았다~~(중략)~~우리는「일본적인 것」의 어머니의 어머니의,그 어머니의 모습을 느낄 수 있었다」
고 하며, 조선 민족의 카테고리를 넘어 보편적인 인류애를 표현하고 싶다는 최승희의 의도를 발견한다. 그리고,
「최승희는 그녀의 천부의 재능과 오랜 근대 무용의 기본적 훈련을 통해, 오래된 조선의 무용을소생시켰다. 이것이야말로 뛰어난 예술가를 할 수 있는 일이며, 딱딱한 말로 표현하자면, 「유산의 비판적 섭취」인 것이다」(24)
라고 하며, 천부의 재능과 부단한 훈련이 인류의 희망과 사랑과 꿈을 표현하게 했다고 村山는 이해 하였다.
또 한사람 문예 비평가인 青野末吉의 평가를 소개한다.
「나는 전통에 묶여있는 일본 무용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것은 이미 영혼의 소리과 영혼의 흐름을 가장한 껍데기뿐인 예술이기 때문이다. 최승희의 무용에는, 영혼의 번민을 들을 수 있다. 그것이 나를 매혹시키는 이유이다.」(25)
낭만파 문학자인 스타르 부인의 사상을 도입한 青野는 격동의 프랑스 혁명기를 살아 남아 황제 나폴레옹과 대립하여 추방당하는 쓰라림을 맛본 스타르 부인과 최승희를 오버랩시키고 있다. 자유해방을 신봉하고, 기존체제에 반항하며, 그리고 연애 지상주의를 추구하는 것이 낭만파 문학자의 상징이었던 당시, 青野는 최승희의 무용에서 동일한 메시지를 발견하고 있었던 것이다. 青野는 그것을「영혼의 번민」이라고 불렀다.
(3-3)한번도 최승희의 무용을 보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상과 같이 이해를 하는 필자에게 그녀의 무용세계를 신격화하려고 한다거나 혹은 확대 해석을 하고 있다고 항의를 하시는 분이 계실지도 모른다. 하지만 역시 최승희는 단지 한국무용 뿐만 아니라, 일본무용, 중국무용, 서양 발레 뿐만 아니라, 인도 무용까지 적극적으로 배우면서, 「동양 무용」의 확립에 노력한 것만은 부정할 수 없다. 그녀의 공연 기록을 되돌아 보는 것만으로도 알수 있는 것처럼, 한국무용을 연기할 때 중국 음악을 사용한다거나, 한국의 부채춤을 추면서 서양발레의 움직임을 가미하였다는 점은 그녀가 민족과 국가의 카테고리를 초월하여 민족예술의 세계를 모색했다는 증거였다. 그것은 현대의 용어로 표현하자면, 「Fusion(융합) 문화」의 창조 활동이었다. 이러한 의미로서 최승희는 바로
Fusion 무용의 선구자였던 것이다.
(3-4)근대의 문화교류는 국경을 전제로한
「문화교류」였다. 이는 근대 국민국가라는 형태속에서는 문화를 통해 국민통합을 획책하는 노력이 계속되어 왔기 때문이다.
① 언어의 표준화
② 국내 문화의 독자성의 강화
③ 지역 문화의 육성
그런데 1997년 7월, 태국의 통화가치 하락을 계기로 아시아 통화전반이 급락하였고, 금융의 불안으로 인해 경기가 악화되어 태국 인도네시아를 거쳐 한국에도 IMF 금융 위기가 발생하였다. 이러한 경제적 위기속에서 1998년에는 한국에 있어서 일본 문화의 해금이 시작되었고, 2000년 제3차 해금으로서 거의 전면적으로 일본 문화는 개방되었다. 1950년대에 전개된 「왜색문화 배척」운동을 생각하면 오늘날의 현상은 비약적으로 개선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시대적인 요구에 부응하여 한국 정부가 모든 문화에 문을 열었다는 것은 당연히 문화적 마찰이 발생하거나, 반대로 극단적인 자문화 지상주의를 부추길수 있는 결과를 초래할수도 있다는 것을 충분히 예측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한번 철폐된 규제를 다시 되돌릴수도 없는 상황이며, 또 한편에서는 인터넷에 의한 정보의 글로벌화가 진행되어, 이미 다양한 문화의 유입은 피할 수 없는 시대적 상황이 되었다. 냉정한 경쟁 원리로 움직이는 경제의 글로벌화처럼, 이제 문화도 「경쟁」의 시대로 이행되리라는 것은 예측가능하다.
이러한 시대적인 상황속에서 다시 고립적인 문화를 재구축하는 것보다, 한국과 일본 사이에 놓여진
바다를 초월한 한일 해협권Fusion(융합) 문화를 창조하는 것이 보다 생산적인 방안이
아닐까? 시대의 흐름을 역행하지 않고 그 흐름을 이용한다면 문화는 단순히 국가라는 카테고리에 한정되지 않고 보다 큰 영역에서 생산적으로 사용되어질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지리적으로 근접한 부산과 후쿠오카 양도시의 고유문화가 다양한 교류를 통해 서로 자극을 줌으로서 「Fusion 문화권」을 창조할 수만 있다면, 세계적으로 전형적 사례가 될것이다. 이렇게만 된다면 한국과 일본에 제2의「최승희」가 탄생할 것임에 틀림없다. 양국이 노력 해야 하는 것은 자민족의 고유성이나 우월성을 만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글로벌 시대에 맞은 공유인식을 가지면서, 세계가 공감하고 감동할 수 있는 새로운 최승희의 무용 세계를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제는 한국의 문화계(무용계)가 단순히 「관광 문화의 봉사자」나 자민족지상주의자 집단이 되어서는 장래의 문화적 비약은 기대할 수 없다.
(3-5)본론문의 키워드
1, 탁월한 예술성
2, 식민지 통치기에 정착한「한국 무용의 레파토리」
3, 전시기에 발견된<조선>-----일본정신이 강조되는 시대에 마르크스주의와 모더니티의 시선에 의해
발견된 <조선>은 폐쇄적인 시대적 상황을 타개하고 「인류애」와 「평화」를 위한 소망이 만들어낸 결정체
4, 글로벌 시대에 있어서의
Fusion 문화의 창조
<注>
(1)Morris‐Suzuki,Tessa、吉見俊哉編『グローバリゼーションの文化政治』(「グローバリゼーション・スタディーズ」第2巻、2004年、岩波書店)
(2)또한 본고와는 정반대의 시점으로 일본을 고찰한 문옥표의 논고가 있음을 지적해 둔다.
Moon, Okppo “Tourism and Cultural Development: Japanese and Korean
Context. Shinji Yamashita , Kadir .H. Bin and J.S.Eadeseds, pp178-193
(3)松原孝俊編『2006年度韓国国際交流財団コロキウム報告書:福岡県民対象シンポジウム編』2007年3月、九州大学韓国研究センター
(4)Eric Hobsbawm &Terence
Ranger” The Invention of Tradition” Canto Book,1992
Eric Hobsbawm “The Construction of Nationhood: Ethnicity, Religion and
Nationalism “ Wiles Lectures, 1996,参照
(5)James Clifford “The Predicament of
Culture: Twentieth-century
Ethnography. Literature, and Art,
”Cambridge and London, Harvard University Press, 1988. 山下晋司訳)
(6)Pieterse,Jan
Nederveen “ Globaliaion as Hybridization” Mike Featherston ,Scott Lash and
Roland Robertson eds,pp45-68,1995
(7)Pfaffin
,George “Concern for Tourism: European Perspective and Response” “Annals of
Tourism Research” 14,pp576-579,1987
(8)Clifford Geertz “Negara: The Theatre State in
Nineteenth-Century”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81
(9)Powell Hickman
“ 1930: The Last Paradise : An American’s Discovery of Bali in the 1920s,
Singapore” Oxford University Press 1986
(10)村井章介『中世倭人伝』岩波新書.1993年
(11)小田管作『象胥紀聞拾遺』、写本、筑波大学付属図書館蔵
(12)Joseph Nye “”Soft Power: The Means to Success in World Politics” 2004
(13)姜尚中『オリエンタリズムの彼方』岩波書店、1996年
(14)『始政五年記念朝鮮物産共進会 京城協賛会報告』京城協賛会残務取扱所、1916年
『朝鮮案内』始政五年記念朝鮮物産共進会、1915年
(15)『始政五年記念朝鮮物産共進会 写真帖』村上写真館、1915年
(16)정병호「춤추는 최승희」현대 미학사,2004年
(17)高嶋雄三郎・정병호『世紀の美人舞踊家崔承喜』エムティ出版、146-148頁、1944年
(18)桑原甲子雄『夢の町』晶文社、1977年.
(19)『中野重治全集』第14巻、筑摩書房、1979年、pp 299-300
(20)深川博史「経済発展の構造と変動」『アジア経済の発展と日本の対応』九州大学出版部,1988年,p21
(21)『韓国の旅』한국관광공사 2001年 일본어판.
(22)신호「비교 민속학」 제21호, 2001년
(23)高嶋雄三郎・정병호『世紀の美人舞踊家崔承喜』エムティ出版、148頁、1944年
(24)高嶋雄三郎・정병호『世紀の美人舞踊家崔承喜』エムティ出版、149頁、1944年
(25)高嶋雄三郎・정병호『世紀の美人舞踊家崔承喜』エムティ出版、172-172頁、1944年
コメント
コメントを投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