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帝国』日本과崔承喜
『帝国』日本과崔承喜
일본
규슈대 한국연구센터 전임교수 松原孝俊(Matsubara
Takatos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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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 차 - 서론 제1부:민족무용이란 무엇인가? 제2부:
1절: 일본인이 본 한국무용:조선왕조시대
2절: 일본인이 본 한국무용:일제 강점기
3절: 일본인이 본 한국무용:1945년~1965년
4절:일본인이 본 한국무용:1965년 ~2000년 제3부:글로벌 시대의 한국무용에 거는 기대 |
서론
본 논문의 목적은 17세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약 400년간 일본인이 어떻게 한국무용을 관람하였는지에 대해 한일교류사의 관점에서 통시적으로 논하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일본인으로 범위를 한정해, 일본인의 한국에 대한 시선과 한국무용과의 관계를 고찰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글로벌 시대의 한국무용에 거는 필자의 기대를 피력하고자 한다.
원래 필자는 무용전문가가 아닐 뿐더러 한국무용에 관한 지식이 전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새로운 시점을 도입하여 무용을 분석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며, 그것을 필자에게 요구한대 해도 달리 대처할 방법이 없다는 점을 미리 말해 둔다. 무용에 대한 전문적 논고는 그 방면의 전문가에게 일임하기로 하고, 비전문가인 필자는 일본인과 한반도의 긴 교류역사 속에서, 결코 많다고는 할수 없을 지라도 17세기부터 오늘에 이르는 각종자료 속에 한국무용과 관련된 기사가 산발적으로 보이는 바, 이번 기회에 일본인에 의한 한국무용관람의 역사를 간단히 정리하는 것에 불과하다.
이를 위해 필자가 알고 있는 한 가장 오래된 기록이 남아있는 17세기를 시발점으로 하여
1)일본인이 본 한국무용:조선왕조시대 - 일본인과 한국인의 교류가 일부 일본인(대마도)에게 한정된 시기
2)일본인이 본 한국무용:일제 강점기-일본이 한반도를 식민지화하여 대량의 일본인이 한반도를 침략한 시기
3)일본인이 본 한국무용:1945년~1965년 일본인의 한반도방문이 엄격하게 제한된 시기
4)일본인이 본 한국무용:1965~2000년-일본인의 한반도 방문이 전면적으로 개방된 시기
의 약 400년간을 4기로 나누어 각각 개관한다. 단지 고대 동아시아에 있어서의 교류를 생각할때, 한국무용이 일본인에게 끼친 문화적 영향력은 일본서기 등의 고대문헌 등에 오락 등의 한국무용을 가르쳤다는 내용이 다수 보이지만 고대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하고 본고에서는 대상 외로 한다.
원래대로 한다면 본고의 서두에 한국무용에 대한 정의와 필자의 입장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지만, 단지 여기에서는 「한국민족에 의해 옛부터 전승된 고전 기법을
기초로 하여, 무대 위에서 표현되는 예술무용」이라고 간단히 설명해 둔다.
또한 본고와는 정반대의 시점으로 일본을 고찰한 문옥표의 논고가 있음을 지적해
둔다.
Moon,Okppo “Tourism and Cultural Development: Japanese and Korean
Context. Shinji Yamashita , Kadir .H. Bin and J.S.Eadeseds,pp178-193)。
제1부 1945년 이전의 역사에 있어서, 1930년대에 갑자기 일본에서 데뷔하여 큰 인기를 얻은 여성무용가를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반도의 무희」 최승희이다. 최승희의 생애에
대해서는 정병호의 「춤추는 최승희」에 설명을 양보한다. 최승희는 1930년대의 일본에서「인기의 최고봉」에 올라, 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로부터도 절찬받았다. 그리고,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무희 최승희를「일본 제일」이라고 인정했다. 그녀는 화장품이나 연필·치약 등의 포스터에 등장해 「드물게 보는 미모. 은혜입은 육체」를 일본국내와 일본의
식민지 공간에 피로하였다. 또 최승희는 도쿄 근교 가마쿠라 해안에서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반소매와 반바지차림으로 클래식발레를 추었다. 그 모습을 카메라에 담은 사진가 桑原甲子雄씨는 「에로스의 여신」이었다고 표현하였다. (桑原甲子雄『夢の町』晶文社、1977年).
최승희 연보에 의하면, 인기 절정기에 있던 1937년 9월 27일, 「유럽방문을
위한 고별 신작 발표회」(도쿄 극장)를 마친 후, 1937년 12월에 구미 공연을 떠났다. 먼저 미국 대륙에 건너간 것을 시작으로 유럽의 프랑스, 스위스, 이탈리아, 독일, 네델란드, 벨기에, 프랑스 등의 각국에서 순회 공연을 계속했다.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 뉴욕을 비롯해 각지에서 공연을 성공시키고, 여세를 몰아 브라질, 우루과이, 아르헨티나, 페루, 칠레, 콜롬비아, 멕시코 등의 남아메리카 각지에서도 공연했다. 1940년 12월 5일, 최승희는 일본으로
다시 돌아오는데, 이는 태평양전쟁이 발발하기 약 1년전 일이었다. 약 140회에 걸친 구미공연후(호치신문1940년12월7일) , 일본에 있어서의 그녀의 이미지는 이미 「반도의 무희」가 아닌, 「중일전쟁 때문에 배일적 감정이 농후한 미국에 가서, 조국을 위해 조선무용을 소개한 반도의 무희 최승희」(미야코신문1938년7월27일)였다. 현재 수중에 있는 유럽 공연의 포스터를 보면, 그녀는 일본인이 아닌「Korean Dancer」라고 명기해 출연하고 있었다. 단지 그녀의 여권은 일본 정부가 발행한
것이었으므로 이름만은 일본식 발음인 「Sai Shoki」로 되어있는 것에서 시대적 제약을 느낀다. 포스터에 나타나 있는 것처럼, 그녀가 연기한 것은 바로 한국 무용이었다.
「조선 무용 20여종과 서양 것을 세 개
정도 준비해 갈 생각입니다. 일본 무용 중에서도 향토무용의 소박한 것이라면 연기할 수 있을 것 같으니까 그런 것을 두 세개 정도 추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사히신문 도쿄판 1937년8월15일)
구미공연 출발 전 이렇게 말한 최승희는 덧붙여서 한국의「시골의 향토무용」도 구미 공연에서 연기하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1945년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반도에서 그래왔듯이, 최승희를 「친일파 」라고 하여 비판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다.
하지만 여기서 관점을 바꾸어, 최승희가 활약한 1930년대~1940년대 일본 정세를 생각해 보자. 아이들조차도 「피었네 피었네 사쿠라가 피었네」가 아닌, 「진격하라 진격하라 군인들이여 진력하라」로 알려진 국정교과서「국어 독본」을 배우기 시작한 것은 1932년부터였다. 1931년 중일 전쟁이후, 일본은 전쟁의 길을 걷기 시작, 1937년 국민정신총동원계획과 1938년 국가총동원법에 따라 전시체제가 형성되었다. 이 법률에 의해서 국민 징용령이나 가격 등 통제령뿐만 아니라, 단체 결사의 금지, 출판 통제 등, 모든 국민 생활이 전쟁을 위해 규제되었다. 무용계에서는 1930년 일본 무용 협회가 결성되었지만, 1940년이 되어 비상체제하에서의「오락」은 금지되었기 때문에, 많은 무용 단체는 활동을 그만둘 수 밖에 없었다. 협회 자체도 그 명칭을 대일본 무용연맹이라고 개칭하고 1940년 10월부터 개시된 대동아전쟁을 위한 일환으로서 재구성 되었다. 클래식 음악만 하더라도 독일 출신의 작곡가 베토벤의
곡은 허가되었지만, 독일 이외 작곡가의 곡 연주는 전면금지되었다.
같은 시기 한반도에 있어도 지원병을 모집하는 뉴스, 영화 등을 통해「반도에 특별지원병제도 발포된지 이미 6년, 드디어 새해부터는 반도 2,400만 동포에 대해 대망의 징병령을 내릴수 있습니다 」라고 하는 나레이션이 흘러 나왔고, 1943년 3월 2일에는 병역법개정이 공포되어 동년 8월 1일에 한반도 전체에 징병제가 시행되었다.
한반도뿐만 아니라 오키나와에 있어서도 전시체제에 돌입하여, 표준어정책에 의해 오키나와 방언을 말살하고, 연극, 연극, 무용 등을 제한해 모든 오키나와색을 부정·배제하여 오키나와 사람들을 강제로 전쟁에 참가시켰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중일 전쟁이 되돌릴
수 없는 수렁에 빠진상태에서, 더욱이
1941년 12월 8일 일본군에 의한 진주만 기습공격으로 일·미 전쟁까지 시작되어, 사태는 한층 전쟁 무드가 높아지고, 이로서 일본내지와 오키나와 대만, 그리고 한반도가 태평양전쟁을 찬미하고 도구화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왜「반도의 무희·최승희」만은 그러한 사회적인 제약을 넘어서 자유롭게 조선 무용을 계속 출
수 있었을까 하는 점이다.
주시하다시피 당시 전황은 1942년 6월5일 미드웨이 해전 패배와 8월 과달카날전투 패배 등으로 악화되었으며, 1943 년 5월에는 알류샨 열도의 앗트섬에서도 일본군이 전멸함으로써 이미 일본의 패배는 결정적이 되었다. 이와 함께 일본 정부의 내무성 정보국은 신문 잡지의 통제, 및 영화·무대공연 등의 예술 활동 통제에도 착수하면서 모든 미디어 통제를 강화했다. 패전 농후한 전시상황을 보도하지 않기 위해 내무성 신문 잡지 검열관은 모든 보도의 자유를 강탈하고 진실을 보도하지 않는 거짓의 전쟁 승리기사 만이 독자에게 계속 제공되었다. 라디오방송과 더불어 극장에서 연기되던 노(能) 가부키(歌舞伎) 浪曲, 고단(講談) 라쿠고(落語) 등의 대중예술 대부분이 금지되었다. 공연 관계자가 전장에 끌려간 점도 있었겠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전시하에서는「전쟁 수행에 불필요한 연극」활동은 사람들로 부터 격리를 시키던지, 도구화되었던 것이다. 쇼와시대 최대의 만화영웅「노라쿠로」(田河水泡作、 잡지『少年倶楽部』게재、講談社刊)가 「싸우는 만화」로 변했던것 처럼.
第2章
이러한 사회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아사히 신문」1942년 12월 3일호를 예로 들면, 바둑 대국보(7단 혼닌보전)와 최승희 관련 기사를 제외하면, 전기사가 태평양전쟁을 찬양하는 기사였다.
「예능소식: 최승희·독무 공연6일부터 14일간, 반도의 무희, 최승희는 6일부터 20일까지(8일 휴연) 14일간 제국극장에서 독무 공연을 개최한다. 이상과
같이 장기 공연을 단독으로 개최하는 것은 우리나라 최초의 시도로서 주목받고 있다. 14일간의 공연일정중 다음과 같이 종목이 4회 변경됨.
제1회 곡목 (6일-11일 매일저녁 7시, 8일 휴연)
제2회 곡목(12일-음력 16일 밤 매일저녁 7시)
제3회 곡목
(17일-20일 매일저녁 7시
제4회 곡목
(12일, 19일 마티네 후 2시)」
이 기사의 바로 옆에는 전쟁에 협력하는 연재만화「후쿠짱」이 그려져 있지만, 반도의 무희·최승희는 전쟁과 전혀 관계가 없다. 거기에서는 군화의 발소리는 전혀 들려 오지 않고, 또 직전의 미드웨이 해전이나 과달카날섬 패배 등은 다른 세계 이야기인양 최승희만이 전쟁에서 격리되어 있었다. 덧붙여서 팜플렛에 기록된 제1회째 의 곡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제1부
1. 세 개의 전통적 리듬(조선의 고전 무용의 세 개의 기본적 움직임을 체계화하여
창작한 춤)
2. 구슬피리의 곡(동양의 전설에 기초한
춤)
3. 화랑의 춤(화랑이란 화려하고 용감한 젊은이의 별칭)
4. 추심(일본의 能楽『隅田川』『藤戸』를 힌트로 한 창작)
5. 보현보살(헤이안 시대 보현보살상에서
받은 느낌을 무용으로 표현)
6. 산조(가야금의 독특한 산조 형식의 5개의 리듬에 의한 춤)
제2부
1. 武魂(能楽의 무용적 수법을 도입한 창작 무용)
2. 艶陽春(부드러운 봄빛을 맞으며 흥에겨운 모습을 표현한 것)
3, 明妃曲(한나라의 昭君의 슬프고 애틋한 모습을 무용으로
한 창작)
4, 草笠画(소년 화랑의 즐거움이 넘쳐나는 순진한 모습)
5, 칠석의 밤(전설「칠석」을 모델로 하여 창작한 무용)
6, 장고춤
이미 패전이 농후하던 1944년 1월29일자「아사히 신문」에서는 한층 더 최승희 관련 기사가 이색적으로 느껴진다. 이 날자의 신문은 전체가 전쟁관련 기사로 구성되어 있다. 라디오 프로그램마저도 오전 5시40분부터 오후 7시 40분까지의 전프로그램이 애국, 근로, 정신, 전장에 관한 내용으로 되어 있다.
유명한 여류 작가 野上弥生子「동심 애호 - 공습에 의한 人口피난과 학동문제의 문제」라는 기사와 「전쟁시 필시 휴대물품: 항공전의 그늘의 힘」, 「식량부를 만들자」등의 기사에 둘러싸여 부자연스러운 기사가 실려 있다.
「최승희의 신작 : 약 4개월간의 북·중지나 여행에서 돌아온 최승희의 신춘 공연은 지나극의 전통적 기법에 사용한 몇 개의 신작을 제공하고 있다. 満宮秋月」에서는 분명히 새로운 표정을 하고 있고, 「묘■」라는 춤에서는 심리적인 음영의 아름다움이 인상적이지만, 총괄적으로 평하자면 너무 소묘적이라 할것이다. 조선 무용의「산조」에서는 발랄함이 살아있고 수작「생지」는 이번 상연 목록에 있어서도 유일한 「작품」이다. 너무 소묘적인 표현보다도 작품을 만드는 것에 경주 해야 할 것이다.
아무튼 최승희가 새로운 동양 무용을 만들기 위한 기법적 소재를 지나에서 찾은 것은 현명한 판단이었으며, 그녀의 경우, 특히 적격자이기에 아시아 예능의 전통의 방향을 기대하고 싶다.
(제국극장, 2월5일까지---光吉夏弥기자)
한층 더 수수께끼 같은 것은 한반도에 있어「조선색 말살 캠페인」이 강력하게 진행하여, 황민화 정책과 창씨개명 운동(1940년의 조선민사령개정), 일본어 상용운동, 내선일체화 운동이 강력하게 전개되던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제국 안에 있는 도쿄, 그것도 천황이 거주하는 황궁을 마주보는 곳에 위치하고 있던 제국극장에서 조선 무용의 명수 최승희의 공연이 개최되었다는 것이다.
더구나 1944년 1월 27일부터 2월 15일까지의 20일간 23회의 장기공연은 일본인들에게 조선 무용의 우수성을 보여주는 것 뿐만아니라, 조선 민족에 대한 존중을 환기시키는 것이었다. 덧붙여서, 이 최승희의 무대를 본 나카노 시게하루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춤이라고 하면 나는 최승희의 마지막 일본공연을 보았다. ~~(중략)~~그것(「조선 민족 무용」: 필자주)을 보고 조선인관객들은 크게 기뻐하고 있었다. 저, 양쪽어깨를 설렁설렁 흔들 때, 객석의 조선인 남자 여자 아이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눈물을 글썽거리며 기뻐했고, 그 날 그들은 한복을 입고 있었다. 그 때의 일은 지금도 선명히 기억하고 있다. (中野重治『中野重治全集』第14巻、筑摩書房、1979年、pp 299-300)
패전이 가까워져 우울한 기분을 불식하기도 하고 국민의 전의를 높이기 위해 모든 미디어와 예술 등이 전쟁 수행의 도구로 총동원되었지만, 최승희의 무대 객석에서는 한복 입은 사람들이 진을 치고 앉아 열렬한 성원을 보냈다고 中野重治는 남기고 있다. 또 高嶋雄三郎도 최승희의 제국극장공연에서 조선인의 성원과 공감하는 풍경이 생각난다고 한다.
第3章
이 수수께끼, 즉 왕궁을 마주보는 제국극장에서 조선인들이 스스로의
Identity를 재확인하는 것이 허락된 수수께끼는 능력없는 필자로서는 무겁게만 느껴지는 과제이지만, 전시하에 있어서의,
1, 영화「綴方教室」(원작・豊田正子 감독 山本嘉次郎、주연 高峰秀子1938년 제작)에서 보여지는 조선인 여성이 등장하는 일상적인 풍경 씬
2, 시나리오「춘향전」(村山知義저、『文学界』1939년1월호수록)의 공표
3, 아쿠다가와상 후보작이 된 김사량의 소설「빛안에」((1939년、『文芸首
都』게재)---1940년 후보작으로서 각광을 받아 조선인의 고뇌가 표현되어 그것을 일본인 독자에게 제공한 것.
4, 사진가 安井仲治・堀野正男이 촬영한 사진에 투영된 시선, 사진에 잘려진 재일 조선인
등에 주목한 有馬学 논고에서 우리는 그 수수께끼를 푸는 열쇠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리마가 지적하듯이, 전시에있어서의<조선>과<조선인>발견은「마르크스주의와 모더니즘을 수용한 사고를 통해 처음 인식된 <조선>」이다. (有馬学,「전시기 일본の모더니즘과 식민지에의 시선-발견된 조선」『「昭和20년 8월15일 식민지 종언과 조선해방의 역사상 재구축(헤이세이 18년도 과학연구비 보고서、연구대표자 松原孝俊、pp 111-122、2007.3月).
(2-2-10)필자는 有馬学 분석 시점을 전면적으로 채용하여 반도의 무희·최승희에 초점을 맞춰, 전시체재하에서 조선 무용의 예술성을 발견한 것은 마르크스주의와 근대 모더니티의 시선을 가지고 있던 村山知義와 朝日新聞記者 光吉夏弥 등에 의한 것이라고 말해 두고 싶다. 만약 이러한 시선이 없었다면, 초토화된 동경의, 그것도 천황의 권위의 대본산인 황궁을 마주보는 제국극장에서 최승희의 조선 무용공연 등은 기획되지 않았을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물론 내무성 정보국 소속 검열관의 깨닫지 못했다고도 말할 수 있겠지만, 그 보다는 투옥·고문도 무서워하지 않았던 최승희의 용기와 예술에 대한 정열을 높이 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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